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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Nov 01. 2020

월요일의 건배사

아현은 흘러넘치는 사랑을 주체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아이가 먹다 뱉은 음식을 손가락으로 훔쳐 자신의 입속에 밀어 넣는 것 같은,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가 버린 게 뭐든 다 마음으로 품을 수 있을 것 같은 사랑 말이다. 아현은 발아래 뒹구는 그 사랑을 끈질기게 모아 이것 보라고, 내 사랑이라고, 이 부스러기들도 내 사랑이라고 외쳤다. 받는 사람 입장에서야 연애 초기에 모자란 것보다 과한 것이 낫다고 아현의 표현이 연애 역사에 획을 그을 만큼 새롭기까지 했다. ‘그만 좀 하지? 이쯤 되니 내가 네 자식 같아. 넌 연애가 아니라 육아를 하는 것 같다니까?’

 서른 살. 다섯 번의 연애. 다섯 번째의 남자는 연애 같은 거 말고 선봐서 결혼부터 하라고 했다. ‘너는 연애 말고 결혼을 해야 해.’ 아현은 결혼을 원한 게 아니었다. 당장 결혼할 생각도 없었다. 넘치는 사랑을 주는 것이 ‘결혼하기 좋은 상대’라는 결론을 만들어낸 것이라면 이건 뭔가 잘못된 거라고 생각했다.

    민아는 사랑한다는 말을 뱉은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현만큼 연애는 했지만 사랑한다고 말해본 적은 별로 없었다. 남자 친구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끔 얼굴을 그의 어깨에 파묻고 등을 끌어안을 뿐이었다. 섹스 중에 사랑한다고 말해달라는 그의 요구에 ‘더 잘해봐, 그럼, 해줄게.’라는,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대꾸를 하기도 했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흔들리던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듣지 못하고 조용히 잠들 뿐이었다. 민아는 잠든 그의 팔을 끌어당겨 베고 누우며 생각했다.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데 왜 꼭 들어야겠다는 거야.’
어둠 속에서 그의 코 고는 소리를 배경음으로 잠을 청해보려던 민아는 다섯 번째의 연애가 끝났다는 아현의 메시지를 받고 몸을 일으켰다. ‘나 일이 있어서 먼저 간다?’ 민아의 속삭임에 그는 알겠다는 건지 뭔지 이불을 끌어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치 같네. 민아는 옷을 입고 대충 머리만 정리한 뒤 밖으로 나왔다. 월요일 저녁 9시. 일요일이 지나 다시 월요일, 내일은 겨우 화요일이라는 현실에 거리는 조용했다. 민아는 아현의 외로워 보이는 등을 발견하고 망설임 없이 술집으로 들어갔다. 손바닥으로 아현의 등을 토닥거린 다음, 엉덩이 즈음에서 떨어진 걸 주워 올리는 시늉을 했다. ‘아이고, 여기 떨어진 사랑. 지난번이랑은 다른가?’ 아현은 민아의 손바닥을 제 손으로 세게 친 후 ‘나쁜 년.’이라며 중얼거렸다.
“이번엔 뭔데?”
“결혼해서 애를 키우래.”
“와, 헤어지는 마당이라고 별소릴 다 하는구나.”
“넌 어디서 오는 거야?”
“몰디브 모텔.”
“그 모텔로 전입 신고하지 그래?”
“좋은 생각이네. 심지어, 거긴 가라앉지도 않을 거야.”
“남친은  잘 있고? 나 때문에 하려던 거 못하고 온 거 아니야?”
“할 건 다 했고. 지금 꿈속에서 누구 코 고는 소리가 큰가 코끼리랑 대결하고 있을걸. 야, 너도 알겠지만 나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 진짜 너무너무 닭살 돋아서 하기 싫어하잖아? 근데 하는 중에 그 말을 해달라는 거야.”
민아는 오늘 헤어진 친구를 앞에 두고 이건 아니구나 싶어 살짝 눈치를 보며 술잔을 들었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게 잘해보라고 했지.”
그만 들을래.”
“사랑이 넘치는 우리 아현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봐.”
“뭔 소리야?”
“너는 누구에게나 다정하잖아. 연애 전에 보여주는 그 다정함이 상대를 끌리게 하는 거거든? 그런데 왜 마지막은 항상 네 새끼나 키우라는 말을 듣는 것 같니? 조절을 못 하겠거든, 딱 적당히 아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해봐. 연애가 1년은 더 길어질걸?”
“적당히 아는 사람. 그나저나 넌 사랑한다는 말을 왜 못하겠다는 거야? 사랑하면, 막 가진 걸 다 주고 싶고 표현하고 싶지 않아?”
“생각해 봤는데, 이게 낯 간지럽기도 하지만 사랑인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거든?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사랑이 아닌 거잖아. 다른 생각이 껴드는 건 사랑이 아니지. 근데 또 싫지는 않아. 싫지 않으니까 같이 밥도 먹고 잠도 자는 거겠지? 그런데 그런 말에 감정을 가두는 게 싫고......”
“넌 싫은 사람이랑 밥 안 먹잖아. 좋으니까 만나는 거겠지. 사랑인지 뭔지 모르지만.”
아현은 손을 들어 메뉴판을 달라고 했다. 어묵탕과 사케를 추가로 주문하고 휴대폰 화면을 껐다 켰다를 반복했다.
“월요일의 몰디브는 조용하겠다?”
“조용하지. 곧 소리 없이 가라앉을 것처럼 긴장되고 모두가 우리한테만 집중하는 느낌이랄까.”
“주말에 안 가는 이유구나.”
“정답.”
민아는 보글보글 끓는 국물을 접시에 덜어 아현의 앞에 놓았다.
“너랑 나랑 반반이면 딱 좋을지도 몰라.”
턱을 괴고 혼자 술을 따르는 아현을 보며 민아는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잔을 부딪쳤다.
“사랑한다.”
민아는 그 말을 하고서 으으으 하며 몸을 떨더니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술을 들이켰다.
“이거 봐, 내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수명이 줄어드는 건 지도 몰라.”
“지랄. 그냥 하기가 싫은 거야.”

“인정하기 싫지만. 또 정답. 역시 내 친구.”
민아는 커다란 어묵을 젓가락으로 갈라 반은 아현에게 건넸다. 울었는지 눈 주위가 부어있는 아현의 눈을 보며 민아는 바쁘게 지나가는 종업원에게 얼음물을 달라고 했다. 민아는 컵에서 얼음을 건져 냅킨으로 감싼 뒤 아현에게 건네며 말했다.
“따라 해. 여섯 번째는 남처럼.”
“여섯 번째는 남처럼.”
“건배.”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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