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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10. 2020

소란했던 시절에

빌리어코스티 - 소란했던 시절에

빌리어코스티 - 소란했던 시절에 듣기


 미영이 들겠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평일이라 예약 손님이 많지 않아 평소보다 빨리 마감할 수 있었다. 30분 일찍 나가는 동료들을 배웅해 주고 흐트러져 있던 청소도구를 정리했다. 수건이 모아져 있는 세탁물 통을 정리해 다용도실로 가면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흘깃 보았다. 나는 괜찮은 걸까. 너무 오랫동안 마음 안을 둥둥 떠다닌 감정은 어느 때는 큰 배라도 지나간 자리처럼 파도가 일렁거리다가도 어느 순간엔 제 자리에 앉아 반대 방향으로 끼익 끼익 소리를 내며 노를 젓기도 했다. 그래서 그것이 진짜 인지 아닌지 진심인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그렇게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거울 앞에 서서, 내 앞에 그녀가 서 있는 듯 고백하곤 했었다. 진실된 거울은 그녀의 부재를 증명하고 나는 피식 웃다가 울어버리곤 했다. 세탁기의 전원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대 서 있다 벨이 울리는 소리에 밖으로 나왔다. 읽을 수 없는 표정. 손을 들어 인사하는 그녀를 보며 나도 알 수 없는 표정을 내 보이며 손을 들었다. 미영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며 매장을 둘러보더니 '아무도 없네.' 했다. 쟈켓과 가방을 대기실에 내려두고 그녀는 몸을 돌려 제일 마지막 자리로 가 앉더니 '여기가 좋아.'라고 했다. "짧게 잘라 줘." "머리 할 거였으면 얘기하지. 다른 날로 예약 잡아줄게." "싫어. 네가 해줘." 미영은 크게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놓았다. 고집을 부릴 때마다 보이던 표정. 이럴 땐 어쩔 수 없다 라고 생각하며 분무기를 손에 들었다. 젖은 머리를 빗는 나를 물끄러미 보던 그녀는 긴 머리카락들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슬픈 눈을 하고선 물었다. "사랑하는 사람 있어?" 가위질을 하던 내 손은 그대로 멈췄다. 거울 속의 미영과 눈이 마주칠 까 서둘러 가위를 다잡았다. "없어?" 얼마간의 침묵이 흐르고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잘린 머리카락이 발치에 쌓이고 미영은 이제 아무 표정도 없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쪽을 다듬기 위해 두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앞으로 숙이게 했다. "다음엔 다른 사람한테 잘라." "그래." "... 힘들어?" "힘들어." "너 포기 안 할 거잖아." "나 그만할 건데. 그만하려고 온 거야." 나는 이제 됐다는 듯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머리 감자." 수건으로 눈을 가려주고 물을 틀어 온도를 맞췄다. 짧아진 머리, 기대기 전에 보았던 붉어진 두 눈. 하얀 거품을 그녀의 머리카락에 올리고 천천히 마사지하듯 샴푸를 시작했다. 그녀의 눈물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영우야." 그녀가 나를 부를 때마다 나는 돌아서서 울곤 했다. 나를 부르는 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힘겨워 어쩌지 못할 때 나를 부른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의 사랑을 어떻게 하지 못하고, 나는 내 사랑을 어쩌지 못한 체 그녀가 나를 부르면 미안해하거나 아파하거나 어떨 땐 미워하면서 위로하곤 했었다. 나를 위한 위로인지 그녀를 위한 것인지 모르지만 나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서서 같은 표정으로 어깨를 두드려 주는 사람이었다. 수건 끝을 잡아 그녀의 눈물이 지나간 자리를 닦아 주었다.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다. 끝은 올까. 그 끝은 뭘까. 8년이라는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 그것이 어떤 의미로 내게 남았는지도 모를 만큼 나 스스로를 혼란스럽게 했다. 미영은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영우야." "왜." "영우야." "나 위로 같은 거 못 해." 난 솔직하지도 못하다고. 나는 내 20대의 모든 것을 너에게 걸었다고. 우리는 이제 30대가 되었고 점점 더 커진 마음을 감추려고 애쓰고, 숨긴 마음이 버거울 때는 모르는 척 내려놓고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고. 우리는 언제까지 닿지도 않을 길을 서로를 보며 걸어야만 할 까. 차라리 내 마음이 변해 이제는 더 갈 수 없겠다고 이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말해버릴까. 미영은 몸을 일으켜 제 자리로 돌아갔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을 수건으로 눌러 닦고 드라이기를 꺼냈다. 드라이기 소리가 우리 사이의 침묵을 가려주었다. 나는 거울 속의 그녀를 언제나처럼 바라보았다. 이건 나의 착각이라고, 환영이라고 계속해서 되뇌었다. 나는 머리를 다 말리지도 못하고 드라이기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어깨에 둘러진 수건을 내려놓고는 뒤로 돌아섰다. 나를 올려다보던 그녀는 내 손을 잡으려는지 두 손을 내밀었다. 놀라 한 발자국 떼어 멀어지려는 나를 붙들고 그녀는 오랜만에 미소를 보였다. 슬프지 않아서 예쁜 눈, 내가 가장 좋아했던 그녀의 눈빛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진심을 전달받았다. 추운 거리로 다시 나서는 그녀를 바라볼 수 없을 것 같아 문을 나서는 그녀를 배웅하지도 못하고 그녀가 앉았던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수화 동아리에서 만났던 우리는 강의실에서 종종 입모양을 보거나 수화로 대화를 나누곤 했었다. 우리의 대화는 언제나 그녀의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 거나 수업이 끝나면 무엇을 할 까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를 앞에 앉혀두고 그녀는 매일 같이 들리지 않는 고백을 했었고 그런 그녀의 고백은 그의 결혼 소식에 비로소 멈추게 되었다. '나, 이제 그만하려고.' 친구들 속에서 그의 결혼을 지켜보던 그녀가 반대편에 서 있던 나를 보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오늘과도 같은 표정으로 '이제 그만.'이라고 말했던 그녀는, 내가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던 순간에 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영우야, 우리 마음, 아프게 내버려 두지 말고 그만 내려놓자." 나는 분명히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는데 그녀의 낮은 목소리는 귓가에서, 심장 언저리에서 점점 크게 울리고 있었다. 두 손안에 얼굴을 가두고, 나는 그녀를 사랑한 이후 처음으로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미안해." "아니야."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언제라도 전할 수 있었던 그 마음을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던 그때를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나는 언제나 그를 향하는 그녀의 눈을 보며 내 마음을 전했다. '사랑한다고.'

지나온 우리 날들이 조금씩 사라져 가도
되돌릴 수가 없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단 한 순간의 기억도 다 버릴 수가 없어서
기억 속에서 여전히 헤매이고 있는 나

흩어져버린 추억과 조각나 버린 마음이
뒤늦게 너를 데려와 마치 손에 닿을 만큼
후회로 물든 순간도 다 버릴 수가 없어서
기억 속에서 여전히 헤매이고 있는 나

그 소란했던 시절에 그대라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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