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식탁 세 번째 이야기
술을 마시는 것만큼 오래되고, 매력적인 문화가 또 있을까. 굳이 들려오는 전설이니 역사를 들지 않더라도 술이 오랜 시간 인류 곁을 지켰음을, 그리고 앞으로도 저녁마다 우리 식탁을 지켜 주리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인간을 알기 위해서 술을 공부해야 한다는 변명 아닌 변명이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 역시 이런 ‘믿음’에 기반한다. 아니, 역사에 기대지(취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삶과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겠나. 우린 취하고, 또 취해야 한다.
그럼 어떤 술을 마실까. 평소 같으면 소주나 맥주 한 잔 기울이자고 하겠지만 오늘은 특별한 술 한잔 어떨까 싶다. 가깝고도 먼 술, 바로 칵테일이다. 칵테일은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활성화되지 않은 문화인데, 그런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칵테일이 하나 있다. 바로 '칵테일의 왕'이라고 불리는 '마티니'이다. 흔히 생각하는 칵테일 잔을 마티니 글라스라고 부를 정도로 마티니는 칵테일을 대표하는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명성만 듣고 처음 바에 온 사람은 마티니를 마셔보고 켁켁거리기도 한다. 그렇다. 웬만해선 마티니는 맛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마티니가 '칵테일의 왕'이 됐을까?
젓지 말고 흔들어서
마티니하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영화, 007이다. 007의 주인공 제임슨 본드는 마티니를 주문하며 그 유명한 대사를 날린다. '젓지말고 흔들어서'.
문제는 이 때문에 사람들이 혼란에 빠졌다는 거다. 마티니는 저어서 만드는 거야, 흔들어서 만드는 거야? 마티니를 유명하게 만든 원동력은 이 '혼란'이다. 이 혼란은 왜 생길까? 그건 '마티니는 어떠어떠한 방법으로 어떠어떠한 재료를 넣어서 만든 칵테일'이라는 정의가 있다는 '편견' 때문이다. 이 편견에 대해 말한 유명한 철학자가 한 사람 있다. 바로 '경험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다.
베이컨과 네 가지 우상
베이컨은 편견에 대해 일침을 가한 철학자였다. 베이컨은 고대의 권위에 저항했고,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 철학, 중세 스콜라 철학이 추상적 지식만을 탐구하므로 비성과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에서 사용하는 '귀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이컨은 이 귀납법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획득할 때, 우리의 정신이 가지고 있는 사물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 편견을 '우상'이라고 불렀는데, 베이컨이 버리기를 주장한 네 가지 우상은 다음과 같다.
- 종족의 우상 : 우리는 본성상 모든 것을 인간의 편에서 생각한다. 예를 들어,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 뻐꾸기는 악하고 고양이 새끼에게 젖을 주는 개는 선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인간중심적인 사고가 '종족의 우상'이며, 이는 당연히 제거되어야만 한다.
- 동굴의 우상 : 동굴의 우상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우상이다. 이 동굴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온 말이다. 동굴 안의 죄수들은 횃불에 일렁이는 그림자가 참된 사물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세계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우리는 각자의 동굴 속에서 각자가 보는 것으로 세계를 판단하려 한다. 예를 들어 늘 자동차를 운전하고 다니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에게 차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같은 주관적 편견이 지나치면 사물이나 사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 시장의 우상 : 말이 우리의 생각에 가져다주는 편견이다. 언어가 우리의 사고에 주는 영향은 대단히 크다. 시장의 우상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누군가에게 '강남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사람이 북적북적한 강남을 떠올리고 '강남은 사람이 많은 곳이다'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시간이 그렇긴 하다.) 그렇지만 새벽 네 시의 강남은 어떨까? 그때에도 사람이 북적북적 할까? 이처럼 말이 우리에게 주는 편견을 '시장의 우상'이라고 한다.
- 극장의 우상 : 전부터 내려오는 견해, 남들의 생각에 휩쓸려서 가지게 되는 편견이다. 우리는 잘못된 학설을 공공연하게 논의된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베이컨은 이 잘못된 견해, 학설들을 '무대에서 환상적이고 연극적인 세계를 만들어내는 각본'이라고 비유했다. 무비판적인 수용 전에 우리에게는 충분한 숙고, 검토가 필요하다.
베이컨은 현상을 올바르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위 네 가지 우상을 버리고 개별적인 경우 하나하나를 상세하게 경험적으로 관찰하고 탐구해야 한다고 했다. 바로 이 방법이 '귀납법'이다.
바(Bar)에 간 베이컨
다시 마티니 얘기로 돌아가보자. 필자는 앞서 마티니를 주문할 때 혼란스러운 이유가 마티니는 어떠어떠한 방법으로 어떠어떠한 재료를 넣어서 만든 칵테일'이라는 정의가 있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보통 마티니를 정의하자면(그게 가능한 일인지는 일단 뒤로 미뤄두고) '칵테일 글라스에 진과 베르무스를 적절한 비율로 넣고 바 스푼으로 저은 후 올리브 장식으로 마무리한 칵테일'이다. 그러나 이건 하나의 편견이다. 자, 베이컨을 바(BAR)로 끌고 들어와 보자.
베이컨이 바 문을 열고 들어온다. 물론 그는 궁중 대신까지 한 몸이니, 자유로운 분위기의 홍대 바를 찾았을 리는 없다. 전통적이고 클래식한, 호텔 바를 들어갔다고 생각해보자.
바에 처음 온 베이컨은 주변을 흘깃흘깃 쳐다보며 바텐더 앞에 앉는다. 그는 짐짓 메뉴를 보는 척 하다가, '경험론의 아버지'라는 자신의 이름에 어울리는 '칵테일의 왕' 마티니를 주문한다. 그러자 그냥 만들어서 주면 좋을 텐데, 바텐더가 베이컨에게 질문을 던진다. (클래식 바는 이게 문제다. 너무 고객을 배려해준다.)
바텐더 : 손님, 마티니 베이스는 어떤 걸로 해드릴까요?
이게 무슨 소린가! 마티니는 진 베이스의 칵테일 아니던가? 하지만 우리의 베이컨이 누구던가. 어느 것 하나 그냥 넘기지 않는 철저한 비판 정신의 소유자다.
베이컨 : 어떤 베이스가 있나?
바텐더 : 진, 혹은 보드카 베이스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 마티니는 진뿐만 아니라 베이스로도 만드는 칵테일이다. 이런 다양한 선택이 마티니를 널리 사랑받게 했다. 검토를 통해 베이컨은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일단 진을 선택해 본다. 그러나 바텐더의 질문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바텐더 : 저어서 드릴까요, 흔들어서 드릴까요?
아니, 칵테일 만드는 방법까지 물어보다니. 그걸 내가 알면 만들어 마시지 여기는 왜 왔겠나, 등등으로 궁시렁 거리며 베이컨은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젓지 말고 흔들어서'?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베이컨은 순간적으로 '흔들어서 주시오.'라고 말하려다가 멈칫한다.
이건 말에서 오는 편견, 시장의 우상이 아닌가! 아니, 극장에서 생긴 편견이니 극장의 우상인가? 아무튼 베이컨은 편견에 빠지지 않는 남자. 한 번 더 묻는다.
베이컨 : 차이가 무엇이오?
그냥 만들어서 줄걸, 이라고 생각하며 바텐더는 친절하게 대답한다.
바텐더 : 흔들어서 조주하는 게 더 부드럽습니다.
베이컨 : 그럼 흔들어서 주시오.
바텐더는 고개를 끄덕이고 쉐이커에 진과 베르무스를 넣고 차카차카 두 음료를 섞는다. 그러나 베이컨에게는 또 한 번의 관문이 남았으니.
바텐더 : 손님, 장식은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아무리 베이컨이라지만 더 이상 견디기는 힘들다. 술 한 잔 마시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베이컨 : 아무거나 주시오!
때로는 본드처럼
베이컨은 조직적인 철학 체계를 지니지는 못한 철학자였다. 하지만 자연과학적 귀납법과 경험적 지식을 강조한 베이컨의 업적은 그를 '경험론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고정된 형태를 고집하지 않고 자유롭게 검토하고 조주할 수 있는 마티니는 '칵테일의 왕'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편견에 빠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편견은 눈을 가리고 앞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드니까. 그렇지만 마티니를 주문할 때는 글쎄, 조금은 편견에 빠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필자는 한 번쯤 본드처럼 멋지게 '젓지 말고 흔들어서!'라고 말해보고 싶다. 한국에선 부끄러우니 저기 영국 어디쯤 가서. 여러분은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