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식탁 다섯 번째 이야기
겨울을 귤로 느낀다. 집에 돌아오는 밤, 몇 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는 과일노점에서 “귤 한 상자에 오천 원”이란 소리가 들리기 전까진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껴입는 옷이 아무리 많아져도 겨울이 왔다는 실감이 나질 않는다. ‘어이구, 저렇게 팔면 농사짓는 분들은 도대체 얼마를 받는 거야? 운송비도 안 나오겠네’란 걱정과 현실은 별개. 외침이 들리는 첫날이면 어김없이 두 팔은 귤 한 상자를 안고 만다. ‘귤 하나에 하루치 비타민이 다 들었다는데, 이 안에 귤이 최소한 100개는 들었을 거고. 하루에 하나씩만 먹으면 평소에 복용하는 비타민C보다 가격도 착하고 자연산이니 내 몸에도 크게 이득’이란 기대, 도 역시 현실과는 동떨어진 계산이다. 이 추운 날, 따뜻한 전기장판에 이불 덮고 누워 하루 종일 TV나 보고 귤이나 까먹는 것 외에 무슨 낙이 있겠나. ‘하루에 하나씩’이란 결심은 결국 입 안 가득 고인 침 앞에 바스라질 뿐이다.
단 하나의 귤 : 코기토(cogito)
하지만 이런 ‘종일 귤 생활’도 12월을 지나 차차 겨울 막바지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싫증이 나게 마련. 이틀이면 사라지던 귤 한 상자는 이제 사흘, 나흘을 지나 일주일이 다 돼도 줄어들 생각이 없다. 슬슬 기지개를 펴고 ‘귤 고르기’를 시작할 시간이다.
귤 고르기? 별거 아니다. 말 그대로 늦게 먹는 바람에 썩어가는 귤을 모조리 골라내는 작업을 말한다. 하얗게 곰팡이 핀 귤이 당사자는 물론이거니와 주변마저 썩게 만들 수 있기 때문. 귤을 고르는 작업은 상자 안의 내용물 모두 쏟아내기에서 시작한다. 신문지를 깔아 놓은 방바닥에 귤을 쏟은 뒤, 하나하나 확인해 멀쩡한 귤만 다시 박스 안에 넣는다. 어설프게 뒤적거리는 선에서 작업을 마치면 상자 깊숙이 있던 녀석이 사고를 치기 십상이다. 썩은 것들을 모두, 완전하게, 골라내는 것. 그것이 이 시점에서 귤을 오래도록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멍하니 앉아 귤을 고르다 보면 이름 하나가 문득 떠오른다. 바로 썩은 귤을 골라내는 것처럼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회의해야 한다고 여긴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다. 이 정신 나간 아저씬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이 꿈에 불과할지 모른다거나 악마에게 속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식 밖의 가설까지 세워가며 귤을 골랐다. 뭐, 의심과 회의를 통해 결코 의심할 수 없는 무언가에 도달하는 것이 학문의 시작이라고 여긴 사람이니 말 다했지 않나?!
어쨌든 그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상자 속에 남은 단 하나의 멀쩡한 귤을 찾아냈다고 선언했다.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줄여서 코기토(cogito)라 불리며,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번역되는 유명한 명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과정을 거쳐 ‘내가 먹고 있는 이 귤의 새콤달콤함도, 내 앞에서 귤을 까먹는 네 존재도 의심할 수 있지만,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건 결코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두 개의 실체, 연장과 사유
멀쩡한 귤을 찾았으니 이젠 먹을 차례다. 귤을 먹으려면? 당연히 껍질과 속을 ‘분리’해야 한다. 데카르트 또한 실체, 즉 변하지 않는 본질을 연장과 사유로 분리했다. 먼저 연장이란 공간을 차지하는 실체를 말한다. 만약 누군가 “어떤 물체의 실체는 연장”이라 말하면 그건 ‘그 물체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쉽게 우리의 ‘몸’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사유는 생각하는 성질이다.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이 연장과 다르다. 우리의 ‘정신’이 여기 해당한다. 이렇듯 본질은 연장과 사유, 육체와 정신으로 나눈 그의 입장을 우리는 ‘심신이원론’이라 부른다.
덧붙이자면 데카르트는 심신이원론의 이론적 토대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람에게 ‘송과선’이란 기관이 있다고 주장했다. 송과선은 정신과 육체가 만나고, 이를 통해 육체가 정신의 통제를 따르게 만드는 소통창구다. 그는 이 기관이 뇌에 있다며 구체적인 위치까지 설명했는데, 과학과 의학이 많은 발전을 이룬 지금엔 적어도 송과선에 대한 그의 주장만큼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중세와 근대의 문을 연 ‘코기토’
귤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 보자. 귤은 껍질을 까 그대로 먹어도 맛있지만 즙을 내 주스를 만들거나 설탕이나 꿀에 재워 차를 담가 먹어도 나름의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다. 그뿐인가. 누군가의 손에서는 샐러드 소스로 탈바꿈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아이스크림을 만들거나 껍질째 불에 구워 ‘귤 구이’를 만들기도 한다.
중세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아우구스티누스 또한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상자 속에서 ‘코기토’를 골라낸 사람이다. 그는 기독교가 확고한 지위를 잡지 못한 중세 초기에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회의론자와 맞서는데 코기토를 활용했다. 그는 어떠한 감각도, 이성도 믿을 수 없다는 회의론자에게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만은 결코 의심할 수 없는 것이라 역설했다. 또한 ‘1+1=2’가 모두가 인정하는 수학적 지식인 것처럼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도덕적 지혜가 존재하며, 이는 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 주장했다. 즉,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에 대한 믿음과 확실성을 구하기 위해 코기토를 사용한 것이다.
데카르트 또한 그의 철학적 목적과 결론을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그 역시 신의 권위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았던 중세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에게 신은 단지 존재할 뿐이며, 그보다는 우리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했다. 즉, 철학의 패러다임을 신에서 인간 중심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는 이후의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칸트, 헤겔, 하이데거 등 이름 한번 들어본 철학자라면 모두 그의 철학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누군가는 심신이원론을 부정하거나 긍정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코기토라는 명제 자체를 언급하기도 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쳐 나갔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라는 말, 현대철학을 알고 싶다면 데카르트부터 알아야 한다는 말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 남은 귤 까먹으며 데카르트를 살펴보자. 이 글을 다시 읽어도, 아님 다른 교양서를 읽어봐도 좋다. 이왕이면 다른 철학자보단 좀 더 꼼꼼하게 알아보자. 데카르트를 이해하는 건 철학을 넘어 오늘날 서양의 사고관을 이해하는 소중한 밑바탕이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