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식탁 열 번째 이야기
"이열치열"이니 "여름엔 삼계탕"이니 하는 말이 있는지는 몰라도 더위가 기승일 땐 시원한 음식이 역시 제격이다. 서걱서걱 살얼음 뜬 열무김치국수, 통통한 팥이며 고소한 미숫가루 얹은 팥빙수, 찬물에 두어 큰 술 훌훌 타 넣은 오미자차를 어찌 김도 안 빠진 장어구이나 삼계탕 따위가 이길 수 있으랴.
만약 이마저도 귀찮고 피곤한 여름이라면 찬물에 밥 말아 곰삭은 장아찌나 얹어 먹는 게 제일이다. 마늘에 깻잎, 오이, 고추, 무, 양파까지 이것저것 단지에 넣고 맛 들여 놓으면, 다른 반찬 하나 없어도 밥 한 그릇쯤 뚝딱 해치우게 만드는 마법 같은 음식이 바로 이 장아찌이니 말이다.
굳이 사소한 문제까지 따지자면 이 장아찌 만들기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게 흠이라면 흠. 적당한 크기로 썰어 넣은 재료에 간장, 설탕, 식초, 물 등을 한데 넣어 끓인 촛물을 부어준 뒤, 2~3일쯤 지나 다시 한 번 물만 끓여 재료에 부어어야 비로소 장아찌다운 장아찌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 이런 일을 반복하다보면 결국 어느 날부턴가는 더위와 게으름에나 파묻혀 ‘그냥 안 먹고 말지’라는 생각만 하게 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처사. 자, 그럼 이보다 훨씬 쉬운 방법으로 장아찌를 만들 수 있다면 어떨까? 이른바 ‘비빔면보다 쉽게 만드는 장아찌’다.
재료
한 통 가득 담길 만큼의 각종 채소(마늘, 깻잎, 오이, 고추, 무, 양파 등), 채소가 들어간 뒤 통을 가득 채울 만큼의 양념(간장, 맥주, 식초, 설탕. 비율은 아래 '만들어 봅시다' 참조)
만들어 봅시다!
1. 씻은 뒤 물기를 없앤 각종 채소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단지에 넣는다.
2. 간장, 식초, 설탕, 그리고 ‘맥주’를 2:1:1:2의 비율로 섞어준 뒤 재료가 담긴 단지에 가득 넣어준다.
3. 일주일 뒤, 선풍기 강풍에 돌려놓고 찬반에 얹어 맛있게 먹는다.
본질은 존재에 선행한다
만약 굳이 이 레시피의 흠을 잡자면 이게 아닐까. 바로 재료에 '맥주'가 들어간다는 거 말이다. 생각해보자, 맥주가 대체 왜 만들어졌는지를. 당연히 ‘시원하게 마시고 적당히 취하는 데에 있는 것’ 아닐까? 그 즐겁고도 명료한 하나의 목적를 위해 지난 수세기 동안 수많은 장인들이 피땀 흘리고, 오O와 하O트가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공장까지 차려가며 맥주를 만들어왔던 것이다. 시원하게 마시지도, 취하지도 못하는 맥주는 결코 맥주라 부를 수 없다. 즉, 맥주는 그 ‘존재’ 이전부터 매우 확실하고도 올바른 ‘목적(또는 본질)’을 가지고 있는 음식이다.
아니,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
앞서 이런 존재와 본질의 관계와 순서에 대해 생각한 철학자가 있었다. 바로 20세기의 마지막 철학자라 불리는 사르트르가 그 주인공. 그가 만약 맥주와 장아찌에 대한 우리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인간은 맥주와 다르다”고 일갈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맥주와 달리 '존재에 앞선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고 말했을 것이란 얘기다. 이 문제는 굳이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답을 얻을 수 있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과연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아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이러한 존재가 된 데에는 이렇다 할 본질도, 따로 정해진 계획 같은 것도 없다. 인간은 결코 특정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존재의 이유가 특정한 목적이나 본질이 정해졌기 때문은 아니다. 인간의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
무한한 자유를 가진 ‘인간’
인간이 스스로를 정의함의 의미는 단순히 자신의 현재가 어떠한가를 밝히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미래에 어떠한 존재가 되고자 하며, 그 존재에 가까워지도록 자신을 만들고 바꿔나간다. 도마와 칼은 누가 뭐래도 도마와 칼일 뿐이고, 맥주는 그저 맥주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자신이 목표로 한 무엇으로도 발전할 수 있다.
물론 세상에는 이 과정과 목표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나 능력을 한정하며 ‘자기기만’에 빠져 사는 사람, 단순히 지난 습관을 반복하고 결정 내리는 사람 역시 다수 존재한다. 늘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려 하거나 종교, 미신에 의지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사르트르가 생각하는 진정한 인간은 다른 것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거나 주변 환경을 핑계 대며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려 들지 않는다. 항상 주체적이고 긍정적이며 도전적인 모습. 진정한 인간 실존은 바로 이런 모습이다.
참여를 동반한 자유, 앙가주망
사르트르의 관심은 개인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한 나의 결정은 주변 사람들, 나아가 국가와 세계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가령 제 2차 세계대전을 이끈 히틀러 개인의 의지와 결정은 수많은 사람을 고통과 죽음으로 내몰았으며, 반대로 장애를 얻었음에도 좌절하지 않은 스티븐 호킹의 열정은 현대 과학문명의 진일보를 앞당겼다. 우리는 자신의 선택이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 혹은 전지구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 결정에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는 이와 관련해 ‘앙가주망Engagement’이라 표현되는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전 세대에는 꿈 꿀 수조차 없었던 집단적 폭력,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그는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을지 모르나 이를 억누르는 집단이 존재하는 한 결코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함을 깨달았다. 그는 전쟁 기간동안 지하 조직의 전단을 만들고, <파리 떼>와 같은 저항적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현대>라는 진보적 성향의 잡지를 만들고 민주혁명연합이란 단체를 조직해 현실 정치에 뛰어들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삶과 사상은 당대 지식인과 젊은이들에게 많은 감명을 남겼다. 전통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행동양식에 도전하라는 그의 외침은 1968년 파리 항쟁의 도화선이 되어 보수정권의 퇴진과 분위기 확산에 일조하였으며, 196~70년대 우리나라의 수많은 지성인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디딤돌이 되기도 했다.
사르트르가 눈을 감은지 30여 년이 지난 오늘, 그에 대한 관심은 이제 예전 같지만은 않다. 혹자는 그의 개인의 주체성 강조 사상은 서양철학의 특별하지 않은 전통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메를로 퐁티와 알베르 카뮈 등과 비교해 그가 못 미치는 사상가이자 소설가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바탕 삼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자신의 사상을 삶 속에서 실천한 그의 모습은 누가 뭐래도 본받을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나 “안 된다”며 아무런 변화도 이루려하지 않은 채 변명과 타협만 일삼으려는 우리에겐 더더욱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