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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펭귄 Mar 12. 2020

나는 이렇게 살았고

기억은 단편적이나 삶은 연속적이다.

어떻게 살아왔나 돌이켜보면,

영화 한 편이 재생되기보단

정신나간 작가의 사진전에 온 것 처럼

일관성 없는 장면들 사이를 지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진들은 이상하게도 무언가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기에

그것을 삶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거다.


피아노가 절반을 차지하던 방

굉장히 낮은 곳에 있던 텔레비전

화면 속에 나오던 트로트 가수의 번쩍이던 노란색 옷

그러다 갑자기 하얀색 페인트가 칠해진 거실문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가고

나는 그 집에서 위인전을 읽는다

하늘색 잠바같은 걸 입었던 것 같은데

머리는 지나치게 짧게 깎았고

무엇을 열심히해야 하는지

어디에 적응해야 하는지 전혀 모른다

길을 가다가 하얀색 옷을 입은 여자를 보고

예쁘다고 생각했고

버스정류장앞에 책방이 있었던가

가물가물하던 내가

언제부터 책이 나의 고향인듯 행세하게 되었는지

16층의 아파트로 이사를 했는데

아무 생각없이 하얀색 거실문의 집 앞까지

걸어갔던 나

걸을 때 생각을 많이 하던 나는

걸을때야말로 생각을 많이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추운 날 음악을 들으며 걷는 게 너무 행복했던

육교밑에서 우회전하면 우리 아파트단지지만

일부러 우회전하지 않고 더 걷기 위해 직진을 하던

그러다 어느날

너와 술을 마시고

버스를 타고 따라가던 나

왠지 그 새벽은

이유도 없이 죄를 지었던 것 같았다

택시비가 5만원 나온 게

그 날인지 다른 날인지

인천가는 회전교차로를 택시타고 지나갔던가

휴대전화를 일부러 안보던 나

지하철에서 전화를 받았지만

못가겠다고 이야기했던 나

부대앞 공터에서

고민을 하던 나

모든 게 엉망이라고 최악이라고

오쿠다 히데오의 최악을 책장에 꽂아두던 나


언젠가 가을에

문자가 왔다

나는 답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나는

학교를 더 빠질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공부를 더 못했을 수도 있었다

절박하게 글을 쓸 수도 있었다

내가 쓴 소설인지 시인지 뭔지에는

살려주세요 라고 써있을수도 있었다

그래서 살았을수도 있고

죽었을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더 안정적일 수도 있었다

세상을 더 몰랐을 수도 있었다

그게 나았을 수도 있었고

김으로 싼 김밥이 아니라

계란으로 싼 계란김밥을 처음 먹고

이대앞에서 맞아 이대앞이었는데

좋아하기도 했다

그랬을 수도 있다 계란김밥을 또 먹었을수도

멕시칸 음식점은 엄청 맛이 없었는데

홍대에서 나는 화를 냈고

뭔가 예쁜 까페도 갔고

그게 같은 날인지 다른 날인지

어두운 계단도 갔고

혼자서 재즈클럽에 갔는데

그건 이태원이다

다음날이 출장이었는데 밤을 샜다

그 날 넘어지면서 휴대전화를 다 부쉈는데

안 그럴수도 있었다

그 마지막 술집만 안 갔다면

그래도 마지막의 마지막에 도망갔다

그 날은 나 혼자였는데

초등학교 앞에 차를 댄 적도 있다

잠깐동안 너에게 뭘 주러 갔는데

차가 견인될 뻔 하기도 하고

뭔가 거짓말을 해보려고 했는데 진짜 있었던 일만 쓰고 있었고


나는 그렇게 살아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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