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 사용 설명서

Chapter 3. 창작자는 혼잣말을 직업으로 한다

by 유혜성

Chapter 3. 창작자는 혼잣말을 직업으로 한다


“어머, 저 사람 누구랑 얘기해…?”

카페 구석, 눈빛이 반쯤 풀린 채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

창밖을 보며 말을 멈췄다 이어갔다, 중얼중얼.

아무리 봐도 앞엔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건 착각이다.

그는 지금 혼자가 아니다.

그는 지금 회의 중이다.


머릿속에서 네 명 정도가 동시에 손을 들고 말하고 있다.

편집자는 눈을 질끈 감고 있고, 기획자는 “이거 콘텐츠 각인데?” 하고 있고, 마케터는 뒤늦게 들어와선 의자 찾는 중이다.


이 모든 걸 조율하는 사람, 딱 한 명 있다.

바로 나.


창작자다.

그리고 창작자의 주요 업무는, 혼잣말이다.


혼잣말은 나의 사무실


하루는 이렇게 시작된다.

“오늘은 뭘 써야 하지?”

눈 뜨자마자 나에게 묻는다.


커피를 내리면서, “아냐, 이거 순서 바꿔야 해.”

샤워하면서, “그 대사는 이렇게 바꿔야 더 감동이지.”


산책 중엔, “저길 지나가다 멈춰서 이렇게 말하면… 영화 한 장면인데?”


그리고 길을 걷다 깜짝 놀란다.

나, 지금 말하고 있었구나.

소리 내서.

심지어 이어폰도 안 끼고.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나를 두 번 쳐다봤다.

처음엔 놀란 눈으로,

두 번째는 약간의 연민으로.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 나,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누가 나한테 지금 시그널 주는 건… 아니겠지?”

정신병? 아니, 직업병입니다


검색해 봤다. 진지하게.

‘혼잣말 많음, 조현병 아닌가요?’

‘혼잣말과 자아분열 차이’


진단 결과는 이렇다.

창작자이며,

기획 중이며,

되게 집중하고 있는 상태임.


나는 단지, 머릿속에서 떠오른 생각이 사라지기 전에 소리로 잡아두는 사람일 뿐이다.


내 안엔 작가가 있고, 감독이 있고, 상담사가 있고, 연출가도 있다.

그들은 아주 시끄럽게 말하고,

나는 그중 가장 목소리 큰 사람의 의견을 골라,

노트북에 한 문장을 적는다.


혼잣말은 창작자의 입 밖으로 나온 기획서다.

그건 병이 아니라, 직업병이다.


혼잣말 중독자를 위한 주변인 가이드


길거리에서 창작자가 혼잣말 중이라면

말을 걸지 말아야 한다.


지금 그는 뇌 속 회의 중이고,

좋은 아이디어 하나만 더 나오면

그날 콘텐츠 마감이 끝날지도 모른다.


만약 민망한 기색이 보인다면

이어폰 하나 꽂아주거나,

그냥 모른 척 지나가 주는 것이 최고의 배려다.


창작자는 ‘기획 중인 걸 들킨 것’보다

‘기획을 방해받는 걸‘ 더 싫어한다.

아이디어가 날아가버리니까.


모른 척해주기,

그게 창작자를 가장 깊이 도와주는 방식이다.

그것은 비언어적 협업이다.


창작자의 자문자답 Q&A


Q. 지금 누구랑 얘기해?

A. 나랑, 나랑, 그리고 또 나랑.


Q. 싸우는 것 같던데?

A. 어제 쓴 자막이랑 오늘 떠오른 대사랑 충돌 중이야.


Q.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괜찮아?

A. 어차피 나중에 영상으로 다 보게 될 사람들이야. 지금은 티저 공개 중.


Q. 그렇게까지 해야 해?

A. 안 하면 다 까먹어.

내 뇌는 창작엔 최적화지만, 저장엔 최악이야.


Q. 이 모든 혼잣말의 끝은 뭐야?

A. 글 한 문장.

아니면, 그냥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그럼 됐지 뭐.


창작자 사용설명서


제품명: 창작자

모델: 혼잣말 고주파형


특징

1. 혼자 있어도 대화 가능

2. 머릿속 회의 가능

3. 말로 기획함

4. 무의식 중에도 자막 구성 가능


사용 환경

1. 샤워 중

2. 카페 창가

3. 엘리베이터 안

4. 사람 없는 골목길

5. 주차장 차 안

6. 혼자 걷는 공원


주의 사항

1. 말을 걸면 회의가 끊길 수 있음

2. 웃기 시작하면 아이디어 절정 도달 중

3. 눈이 흔들리면 대체 문장 고르는 중

4. 말없이 메모 중이면 이미 창작 완료됨


추천 조치

1. 이어폰 없는 혼잣말 발견 시

• 이어폰 하나 꽂아주기 or 그냥 모른 척 지나가기

2. “무슨 일이야?” 묻지 말기

• 그건 지금 잘되고 있다는 뜻

3. “좋은데?” 한마디면

• 다음 콘텐츠에 당신 이름 넣어줌


자가진단: 당신도 창작자입니까?


1. 샤워하다 아이디어 떠올라 젖은 손으로 메모앱 켠 적 있다.

(방수폰은 필수)


2. 옷을 입으며 “오늘의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식으로 혼자 내레이션 해본 적 있다.

(TV에 안 나올 뿐, 당신도 다큐 주인공입니다.)


3. 길을 걷다가 혼잣말했는데, 민망함보다 “대사 좋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민망한 게 아니라, 대본 리딩 중이었습니다.)


4. “지금 누구랑 얘기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다.

(아니요, 저는 ‘아이디어’랑 얘기 중이었어요.)


5. 대화 도중 갑자기 메모 앱 켜고 뭔가를 적느라 대답을 놓친 적 있다.

(아이디어는 사람보다 빠르게 떠나니까요.)


6. 어느 순간 자세가 바르게 펴지고, 말투가 다큐 내레이터처럼 바뀐 적 있다.

(무의식이 먼저 콘티 짜는 중입니다.)


7. ‘자려고 누웠다가, 갑자기 눈을 뜨고 메모앱 켜본 적 있다.

(창작자는 잠보다 아이디어가 먼저입니다.)


총평

• 2개 이상 해당되면?

이미 당신 안에 창작자가 살고 있습니다.

• 5개 이상 해당되면?

당신은 창작자입니다. 단지 아직 데뷔를 안 했을 뿐.

• 7개 전부 해당되면?

지금 이 글을 보며 “나도 이런 글 쓰고 싶다”는 생각하셨죠? 네, 확정입니다.


세상에 없는 걸 자꾸 상상하고, 이미 있는 것도 새로 보이게 만드는 사람.

창작자는 그런 ‘이상한 사람’입니다. 당신처럼요.


혼잣말은 당신의 언어다


혼잣말은 연습이다. 기획이다. 치유다.


혼잣말은 머릿속에서 부글거리는 것들이

입 밖으로 흘러나온 자국이다.


창작자는 자기를 설득하면서 세상을 설득한다.

혼잣말은 그 설득의 리허설이다.

때로는 독백이고, 기도고,

공기 중에 던진 마음의 스케치다.


혼잣말은 나를 구해낸다.

그리고 아주 가끔,

누군가의 마음도 구해낸다.


그래서 나는,

혼잣말을 직업으로 한다.


그리고 내일 아침, 또 다른 회의가 시작된다.

이번엔, 어떤 대사가 날 찾아올까?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comet_you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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