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하니 있을 수 있는 여유

설레지는 않아도, 봄 같은 마음


일이 끝나고 커피를 마셨는데 맛이 없었다. 서점에 들러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옆사람이 골라든 책을 나도 하나 골라 들었다. 집에 와서야 제대로 펼쳐보니 나의 취향은 아닌 책이었다. 이렇게 묘하게 핀트가 어긋나는 날이 있다.


무언가 재미있는 걸 하고 싶었는데, 하는 것마다 조금씩 엇나가는 날에는 조금 심통이 난다.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서 정말 오랜만에 무언가 신나는 일을 찾고 싶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지금 내가 얼마나 한가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 새삼 돌아보았다.


재미없는 게 싫다니, 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마음인가.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해야 했던 겨울은 어느새 지나있었나 보다. 나도 모르는 새에 봄이었다. 인색한 마음에도 계절은 돌고 돌아 봄이 왔구나. 느려지는 심장 박동수와 함께 마음에 미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나는 원래 봄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더랬지. 유난히도 봄을 타서 이래저래 고생하는 계절이니까. 나는 아직 화사하고 눈부실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나는 아직 조금 더 웅크려 있고 싶은데, 저 홀로 꽃바람 일으키며 따뜻한 바람 불러일으키는 계절이니까...


멍하니 소파에 앉아 이리저리 흘러가는 생각을 놓아주었다.



brunch.png Blissful Moment © TUW 튜



마음의 봄. 조금 무료하지만 감정의 기복 없이, 이따금씩 감상에 젖을 여유가 있는 계절. 조금 따분하고 나른해 쏟아지는 잠과 싸워야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앉아 있어도 누구도 탓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날들. 이러한 일상이 얼마나 고마운 일상인지 새삼 느낀다. 아무 일도 없기를,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하고 눈물에 눈이 짓무르도록 빌던 날에 염원했던 날이 이런 날이 었을 것이다.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완벽한 일상이야 상상 속의 것이겠지만, 언제나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가지만, 언제고 그 폭탄은 터지고야 말겠지만... 오늘은 아무 일도 없다. 내일도 별일 없을 것이라는 안도. 일주일 후에도, 한 달 후에도- 적어도 몇 개월쯤은... 조금 가까운 미래를 세다 보면 다시금 빈다. 그날들에도 아무 일도 없기를.


그리고 정말 아무 일 없이 지나가고 있는 오늘이, 지루하고 따분하고 하나도 설레지 않는 오늘이, 얼마나 고마운 하루인지 깨닫는다. 하루쯤 이래저래 모든 것이 엇나가도, 하나도 심통 부릴 이유가 없음에 오히려 미소 짓게 된다.


오늘 하루 잘 안 풀리면, 내일 하지 뭐.


그렇게 생각하고, 또 흘러가는 생각들을 멀찍이 구경하며 봄을 만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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