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형, <붕대 감기>
1. 윤이형 작가의 책을 읽는 것은 <붕대 감기>가 처음이었다(그 전에 여러 작가들의 단편이 같이 있는 소설집에서 그의 소설도 읽었다). 그가 더 이상 작가로서의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그의 책을 읽다니, 어쩐지 그런 내가 조금 우습나 생각되었지만 한편으론 더 늦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작가의 다음 글도 부디 만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을 가져본다. <붕대 감기> 읽기를 마친 후 책을 덮으며 나는 누군가에게 페미니즘을 생각하며 책을 건넨다면 이 책을 주면 좋겠구나 생각했다. 네가 어떤 날 눈물을 흘렸겠구나, 네가 어떤 날 벽이 아닌 온기가 있는 사람이 필요했겠구나, 내가 미처 다 알지 못하더라도 너의 그런 시간들이 있었음을 위로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나는 나에게 작가의 다른 책을 건네주었다. <붕대 감기>를 읽고 <작은 마음 동호회> 소설집을 읽었다.
2. 네가 생각이 났다. 나는 이제 너를 생각하며 아프거나 슬퍼지는 시간을 거의 갖지 않는다. 여전히 너를 생각할 때는 가끔씩 있지만, 지금 너와 같이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러니까 이제는 우리가 안부를 전하는 것도 어색해진 누군가들이 되었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아프고 슬픈 일로 갖게 된다면 나는 지금처럼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조심스러워 하게 될지 모르니까. ‘같아지겠다는 게 아니고 상처받을 준비가 됐다는 거야’라는 진경의 중얼거림에 우리가 서로 단일할 수 없는 존재들이며 수많은 교차로 앞에 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 내면의 어딘가 여전히 같아야 한다고 아집의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었을까 질문이 생겼다.
우리가 같지 않아도 기꺼이 함께하고 기꺼이 상처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마음가짐을 소리 내어 쓰진 않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 그러겠지 생각한 것들이 실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사실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확신할 수 있었나 싶어져 조금 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러니까 진경과는 달리 상처 받을 준비는 하나도 되지 않은 채 같아지려고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걸 무의식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던 시절이라 돌아보니 결국 상처 받게 되었을지도 모르고.
3. 나는 너를 많이 좋아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도착해 있는 자리가’ 있듯 우리 역시 별 수 없이 교집합을 만들어 나누기 어려운 환경이 되었고, 그것은 너의 잘못도 나의 잘못도 아님을 알기에 과거와 다른 우리의 모습에 나는 좀 많이 슬퍼했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하고, 살면서 계속 겪을 일일 텐데 나는 이리 매번 아프고 울면 어쩌나 싶기도 했지만, 그것이 또 나란 사람인 것 같아 안아주기로 했다.
어쩌면 우리가 서로를 믿거나 좋아했다는 것 역시 우리 스스로가 단단한 벽을 함께 쌓아올린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한 어떤 사람, 어떤 공간에 의해 가능했던 것은 아닐지 이제는 어디에도 물어볼 수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는 질문들이 마음에 피어올랐지만, 낮은 마음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나의 삶의 궤적에도, 너의 삶의 궤적에도 우리가 같이 애써온 것들은 어쩌면 너무 작을지도 모르고,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슬퍼하기만 할 순 없으니까.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고, 변화될 텐데 내가 그토록 붙잡고만 있다면 내일을 그리기 어려울 테니까.
4. 나는 여전히 나를 닮거나 너를 닮거나 혹은 우리와 전혀 다르거나한 다채로운 ‘누군가’들일 여성들을 만나며 살고 있다. ‘누군가’인 여성들과 거리가 멀어지고, 더는 만나지 않기도 하고, 또 ‘누군가’인 여성들과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가고, 자주 마주하기도 하면서. 품었던 애정이 더는 발휘되지 못하여 아파했던 시간은 결국은 나아져 ‘아물아물 돌아오는 삶’이 되었지만, 그 경험들은 결코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희미해지겠지만 몸은 그것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작고 좁은 마음으로’ 몸이 채워지지는 않더라고, 중얼거릴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네가 오늘도 안전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뿐이라는 것을 이젠 슬픔도 아쉬움도 없이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나의 지금의 곁, 그리고 그 곁을 또 둘러싸고 있는 ‘누군가’들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에너지가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비록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더는 없을지라도 그것을 슬퍼하지 않기로 했다.
5.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분명히 있다.
나의 자리에서 지금 관계하고 만나는 이들을 놓지 않고 계속 가보는 것. 비록 그것이 언제까지라고 확신할 수도 장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나’라는 사람이 되는 데에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지우지 않고도 가능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더 깊은 마음을 들여 바라보는 것. 작아서 무시했지만 어쩌면 삶의 순간순간을 채우고 있어 합치면 큰 덩어리가 될지 모르는 미움을 발견할 때 너무 아프지 않도록 같이 손 잡아주는 것. 연약한 것이 약하다고 매몰찼던 기억에 자책하지 않는 것. 나와 너무 다른 수많은 여자들, 그러나 또 너무나 비슷한 그 여자들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랑함이 우리를 아프게 했던 것보다 더 커다랗고 행복할 수 있음을 계속해서 경험하고, 기억하고, 들려줄 수 있다 믿는 것.
6. 그러나 계속해서 상처 받을 것이다. 여전히 같지 않은, 너무 다른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에 상처받음은 너무나 당연하게 올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연습을 한다고 해도 별 수 없이 또 우리는 상처 받고 눈물 흘릴 것이다. 상처 받았던 시절은 늘 진행형처럼 이어져 결국 나는 늘 상처 받는 사람으로 살지도 모른다. 감당 하겠다 마음 품어도 상처받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래서 또 문을 걸어 잠그고 많은 눈물 흘릴지 모른다. 그럼에도 사랑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에게 상처 받았지만,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위안 받아 견디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곁들로 그대로 있는 ‘그’ 사람이 되어보자고 오늘도 읊조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다고 마음 다지게 된다.
내게는 여전히, 많은 사랑이 존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