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혁신파크는 내게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성장의 챕터’는 바로, 이 질문으로부터 출발했다. 누군가에겐 일터지만, 누군가에겐 놀이터일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출발점이지만 또 누군에게는 쉼표나 마침표로 찍힐 이곳. 수많은 우리들이 존재하는 만큼 혁신파크에 관한 의미와 기억도 각양각색일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이곳은 '성장의 시공간'으로도 기억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성장은 ‘스스로 자람’이다. 파크의 수많은 나무처럼, 이곳 사람들 역시 햇볕을 쬐고 때론 비바람을 맞으며 성장하고 있다. 만약 우리 삶을 여느 책처럼 챕터로 나눌 수 있다면, 분명 누군가는 이곳에서 성장의 한 챕터를 분연히 지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서울혁신파크는 아이들에게 문턱 없는 놀이터다. 철근 구조물 위로 날쌔게 몸을 던지는 파쿠르 교육생부터 킥보드를 타고 놀거나 피아노숲 그늘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노는 아이들까지. 파크를 찾는 어린이들은 <성장의 챕터>를 기획하며 떠오른 첫 번째 그룹이었다. 2018년 가을부터 어린이를 위한 디지털 놀이터를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혁신파크를 찾고 있다는 크리킨디센터(서울시립 은평 청소년 미래진로센터)의 '어린이디단' 을 만났다.
상상의 숲에서 자라는 핑퐁 놀이터
고백하건대, 아이들과 진득하게 앉아 인터뷰를 이어갈 수 있으리란 기대는 30분도 채 안 돼 무참히 깨졌다. ‘놀고 싶어요. 나가면 안 돼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몸을 비꼬는 아이들을 따라 문을 박차고 나가는 수밖에.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이었다. 실내에서 단답형으로 일관하던 아이들은 필자를 놀이 구성원으로 받아준 것인지, 쩔쩔매는 게 불쌍했는지 조금씩 곁을 내줬다. “나무, 오늘이 제헌절 몇 주기인 줄 알아요?", "나무, 청년청 앞에 물고기 수조는 어떻게 됐어요?", "나무, 이 구조물은 누가 만든 거예요?”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외려 내가 인터뷰를 당했다.
‘어린이디단’은 ‘어린이 디지털 작업단’의 줄임말이다. ‘디단’은 서울혁신파크 상상청에 있는 크리킨디센터에서 ‘핑퐁놀이터’를 3회째 준비하고 치러온 초등학생들이다. 동시에 혁신파크를 날다람쥐처럼 활보하는 아이들 가운데 한 무리이기도 하다.
2018년 문을 연 크리킨디센터는 그 해, 청소년 미래 진로 키워드로 ‘디지털’을 주목했다. 이내 디지털에 관심 있는 다양한 연령의 ‘디지털 활동가(Digital Players)’가 모여들었다. ‘어린이디단’은 이들이 ‘어린이를 위한 디지털 놀이터’를 만들기로 작당하고 모집한 첫 참조 그룹이었다. 어린이를 위한 놀이터를 만드는데 어린이가 빠져선 안 될 일이었다.
2018년 가을, ‘어린이디단’ 이름으로 여섯 명의 아이들이 뭉쳤다. 아이들이 파크에 모여 처음 한 일은 파크의 놀거리들을 부지런히 탐색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디지털 장비가 갖춰진 ‘팹랩’, 폐목재로도 필요한 물건을 뚝딱 만들어내는 ‘마을공방 사이’, 버려진 장난감들이 산처럼 쌓인 ‘금자동이’, 전기 없이 운영하는 ‘비전화카페’, 길이랄 게 딱히 없는 뒷산까지... 혁신파크는 아이들에게 거대한 놀이터 그 자체였다. 어느 날인가 남는 탁구채로 공을 주고받다가 그려본 ‘핑퐁’ 두 글자는 그들이 만들어갈 놀이터의 정식 이름이 됐다. ‘주고받는 즐거움이 있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 없는’ 놀이터에 대한 소망도 담았다.
어린이들은 상상력 전문가예요. 어른들은 아이들보다 디지털 기술을 더 잘 알고 있죠. 핑퐁놀이터의 핵심은 상상력 전문가인 어린이와 디지털 전문 작업자들이 협업해 함께 놀이터를 만드는 거예요.
- 크리킨디센터 어린이디단 담당자 ‘뭉’
놀이터를 만드는 과정은 대략 이러했다. 아이들이 놀이터를 구현할 장소를 실측하고 도면을 그린다. 삐뚤빼뚤 색색으로 그린 도면에 따라 필요한 자재를 구하고 기술 구현이 어려운 부분은 다양한 어른들의 힘을 빌린다. 여기서 ‘어른’이라 함은 파크 안팎의 전문가들이다. 그렇게 쌓인 영감과 지식은 놀이터에 대한 상상을 견고하게 만드는 뼈대가 됐다. 놀이터는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자라고 아이들은 배우지 않으면서 배웠다.
‘딴짓하러 갈까?’로 시작되는 파크 산책은 더 적극적으로 놀 궁리를 하는 시간이었다. 버려진, 혹은 쓸모를 다한 물건들로 각자 아지트를 만들거나 에어로켓을 쏘아 올렸다. 이런저런 놀이로 지쳐 잔뜩 허기져 돌아오면 누군가 차려준 간식을 배불리 먹었다. 담당자 뭉은 그런 아이들을 ‘보헤미안’이라 불렀다. 정해진 법칙도, 정답도 없이 파크를 누볐다. 그러다가도 진지한 표정으로 앉아 무언가 뚝딱뚝딱 만드는 아이에게 “무엇을 만들고 있어?”하고 물으면, “일단 내키는 대로 만들고, 주제는 나중에 정할 거예요.”라며 받아치는 식이었다. “학교에서 딴짓은 ‘반항’인데, 파크에서는 딴짓이 일상이에요.” 빛이 말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아이들은 그것을 ‘자유’라고 불렀다.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재밌으니까
1회 핑퐁놀이터에서 아이들은 VR 영상을 만들었다. 평소 만들고 싶었던 미니 자동차, 땅속 터널, 디지털 수족관, 장난감, VR 게임 등을 한 번에 구현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아이들 옆에는 번뜩이는 상상을 디지털 기술로 구현할 수 있는 디지털 전문가가 있었다.
“릴리쿰 (‘만들기’를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취하여 환경과 일상을 복원하려는 사람들이 실험하고 교류하는 그룹)의 물고기가 3회까지 아이들과 함께 작업해줬어요. 고무신학교(어른과 아이들의 쉼이 있는 놀이터)의 고무신도 아이들과 함께했고요. 파크에 있다 보니 관계가 점점 확장돼요. FAN5 (Fablab Asia Network 5)행사 때는 씨앗 폭탄을 얻어서 공터에 심기도 하고, 작년 ‘언유주얼 서스펙트 페스티벌 서울’에서는 디단 아이들이 미래도시 모습을 상상해 시민들 앞에서 발표도 했어요. ‘미래도시를 상상해 보자’고 했더니 한 아이가 그래요.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니냐고. 지금 우리가 하기에 달렸으니까.' 듣고 보니 그 말이 맞아요. 아이들도 다 알고 있어요.”
핑퐁놀이터 두 번째 회차부터 ‘어린이디단’은 놀이터의 기획과 실행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지난여름 300여 명이 몰린 세 번째 핑퐁놀이터에서 아이들은 홀로그램을 이용한 귀신의 집을 만들었다. 홀로그램 기술은 릴리쿰이, 귀신의 집은 아이들이 아이디어를 냈다.
아이들은 귀신 분장을 하고 연기를 하며 직접 영상 촬영도 했다. 핑퐁놀이터 어느 한 곳 아이들 손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 세 번의 놀이터를 여는 동안 아이들은 파크에서 자랐다. 자신이 만든 놀이터에 얼굴 모르는 또래가 와서 신나게 놀다 가는 것도 더는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어린이 모두가 함께 놀 수 있는 놀이터를 상상하고 만드는 것에 점점 자부심이 생겼다. 아이들이 만든 놀이터는 무엇보다 뭇 또래들의 마음에 쏙 들었다.
무엇보다 달라진 건 ‘어린이디단’의 태도였다. 제한된 상황이나 허락을 구하는 것이 익숙했던 아이들이 제 의견을 정확히 내고 약속 시각보다 훨씬 일찍 나와 그날 할 일을 찾았다. “무언가 상상하고 실현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주체성이 생겼어요. 이제 저를 완전히 리드해요.” 담당자 뭉이 웃으며 말했다.
아이들은 함께 있을 때 ‘자유’라는 단어를 자주 썼다. ‘어린이디단’ 활동과 ‘파크’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아이 중 하나는 “파크처럼 자유로운 공간은 많아도, 자유로울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아무렇게나’, ‘아무거나’, ‘마음대로’, ‘재밌으니까’... 아이들이 말했던 단어는 그들이 파크 하면 떠올릴 가장 명쾌한 이미지들이 아닐까 싶다.
학교에선 만들 것을 정해주고, 여기서는 우리가 만들 것을 스스로 정해요. 학교에선 상상하고, 여기서는 상상한 것을 만들죠. 그게 제일 좋아요
- 어린이디단
어린이디단은 올 9월부터 네 번째 디단 활동을 다시 시작됐다. 프로젝트명은 아이들 목소리를 더 많이 담고자 <어린이, 보헤미안들의 랩소디>(가칭)라고 정했다. 어린이들이 만들고 싶은 미래의 모습을 스토리텔링하여 VR 체험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굵직한 줄기가 될 예정이라고. 2019년을 마지막 한 달을 앞둔 11월 30일, 아이들이 만든 네 번째 핑퐁놀이터가 열린다. 아이들이 만든 놀이터에서 한바탕 제대로 놀아보자.
글 ㅣ 서울혁신센터 홍보문화팀 나무
사진, 영상 ㅣ 크리킨디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