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일기] 실비막국수, 춘천

'춘천막국수' 명칭의 원조, 감칠맛 튼튼한 동치미 육수

by 김고로

민족 최대 명절 중의 하나인 2월의 설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설에는 김고로의 친가가 있는 부산에 가기 때문에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2월이 되기 전 좋은 때에 춘천 처가를 방문하기로 했다. 김고로가 춘천에 가는 즐거움은 장모님의 솜씨와 노포 방문. 춘천 처가를 방문할 때마다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는 노포를 방문했었는데 이번에 목표로 한 곳은 '실비막국수'.


춘천에서 '춘천막국수'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했으며 막국수 등록 1호점이라는 점에서 춘천막국수 문화에서는 상징적인 곳이다. 사람들이 이곳 막국수가 최초냐 아니냐, 맛이 어떻냐를 떠나서 식도락을 좋아하는 김고로의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곳이 아닐 수 없다.


원래는 장인어른께서 곧잘 가셨다는 노포, 문화예술회관 앞의 '평양막국수'를 가려고 했으나 최근 근황을 보니 해당 막국수집은 영업을 안 하는 듯하여 '실비막국수'로 가기로 했다. 지금은 3대째, 창업자의 손자분께서 아내분과 함께 같은 자리에서 계속 영업을 하고 있으시니 좁은 골목으로 이루어진 언덕 동네에 1950년대에 개업한 갈비노포인 '보운정갈비' 바로 맞은편 1층 구식 가옥을 개조한 식당이 실비막국수다.


주말에는 긴 줄로 기다려야 한다는 평도 있었는데 토요일 점심에 방문한 김고로와 처가 가족들은 수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 기다림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기다란 형광들의 밝은 푸른빛이 환한 홀 아래 짙은 나뭇결의 벽과 천장, 목재와 철로 이루어진 테이블들, 입구에서 바로 정면에 있는 작은 주방에서 뜨거운 김과 물소리, 불이 피어오르는 소리가 나며 막국수를 뽑는 곳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1대 막국수, 2대 막국수 등으로 메뉴가 이루어져 있으나, 옆에 세부적인 설명이 1대는 고기가 올라간 것, 2대는 고기 없는 기본 막국수임을 알려주면서 손님들을 안내한다.


현 사장님의 아내로 보이시는 분이 김고로와 가족들을 맞이하신다.


"몇 분이세요?"


"다섯 명입니다."


"그럼 여기로 앉으세요."


이쁜 그녀의 이제 막 6살 된 조카가 자리에 앉으며 친절한 웃음을 띄운 여사장님께 묻는다.


"여기는 왜 이렇게 가게가 작아요?"


세상의 많은 것들을 아직 모르는 순수하고 무례한 어린아이의 질문이지만,


"아줌마가 돈 더 많이 벌어서 더 크게 만들게, 미안해."라고 하시며,


웃음으로 답하시니 그들의 대화를 듣던 김고로와 이쁜 그녀, 장인장모님도 다 같이 웃었다. 친절하고 재치 있는 사장님의 대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김고로는 고기가 없는 기본 막국수를 주문했고 이쁜 그녀와 장인장모님도 모두 기본 막국수로 주문을 하셨다. 아침 식사를 한지 얼마 안 되었기도 하고, 곱빼기를 주문하면 양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는 평이 있어서 김고로는 사리를 추가 주문하지 않았다.


"이건 뜨거운 물이고요, 요거는 차가운 육수예요."


뜨거운 물이 담긴 보온주전자와 찬 양철 주전자가 식탁 위로 등장한다. 무언가 구수한 향기가 난다, 막국수 집이니까 메밀면을 삶고 나온 면수임이 틀림없다.


"나 면수 마실래."


김고로는 이쁜 그녀와 가족들에게 면수 한 컵을 따라주고 본인도 맛을 본다. 여느 막국수 집에서 먹을 수 있는 무언가 끈적하고 구수한 메밀면 맛이다. 그리고 이어서 차갑게 나온 막국수 육수를 바로 맛본다.


후루룹


상큼하고 살짝 시큼한 맛이 나는 동치미의 맛에 구수한 고기 육수의 맛이 따라오며 혀끝에 눌러앉는다. 이전에 어느 노포 작가님이 말씀하셨던 동치미와 고기육수가 반반 섞인 원조 평양냉면의 맛이 이것과 비슷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뒤로 진한 감칠맛이 피어오른다. 처음에는 물음표가 뜨는 맛이지만 끝으로 가면서 마침표가 되는 육수였기에, 김고로를 납득시키기 충분한 육수였다.


'이거 막국수로 먹으면 맛나겠는데.'


이윽고 커다란 스테인리스 사발에 막국수 뭉치와 새빨간 양념, 무채와 삶은 달걀이 담긴 막국수가 등장한다. 삶은 달걀을 좋아하지 않는 김고로는 이쁜 그녀에게 달걀을 넘겨주고, 막국수가 반이상 잠길 정도까지 육수를 넉넉하게 부어서 양념장을 풀기 시작했다.



가게 안에 막국수를 맛있게 먹는 방법으로 식초, 설탕 그리고 겨자를 추가해 먹는 방법이 있지만 김고로는 메밀면과 육수로만 실비막국수를 즐기고 싶었다. 면을 먹어보니, 황해도에서 내려오신 창업자분께서 툭툭 끊어지는 메밀의 식감보다는 조금 더 쫄깃하고 찰지게 메밀면을 개량했다고 하신 설명처럼, 찰랑거리면서 입안에 휘리릭 감기는 느낌이 혀에 찰싹 붙는다.


짙은 숯색 면발에 더 까만 석탄가루와 같은 메밀껍질들이 콕콕 박혀 꺼끌꺼끌할 것 같지만 실비막국수의 메밀면은 매끄럽고 탄력 넘친다. 그리고 강렬한 색과는 다르게 약간의 매콤함과 알싸함만이 육수에 녹아든 양념이 심심할 수도 있는 막국수에 맛을 더한다.



후루루룩


튀어 오르는 면발과 함께 동치미의 시원함이 먼저 혀를 덮는다, 달콤한 무와 발효된 부재료들의 조화로 입안을 상쾌하게 만드는 맑은 맛. 거기에 고소하고 진한 고기의 맛이 쑤욱하고 고개를 들어 입안을 뒤이어 덮는다. 동치미 육수로만 깔끔하고 슴슴한 막국수의 매력을 표현할 수도 있지만, 고기육수를 섞으면 채수에서는 뽐낼 수 없는 육수만의 진득한 맛이 있다. 가벼우면서도 묵직한 고기의 맛이 강한 힘으로 손님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그 때문일까, 김고로는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아직 입천장과 벽에 눌어붙은 고기맛을 아쉬움으로 핥았다. 처음에는 이전 막국수 노포들에서 먹던 깔끔한 동치미의 맛이 아니기에 어색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맛이 좋았다. 크게 허기가 진 김고로가 아니었지만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 채 덩그러니 남은 사발을 보니 무언가 더 먹고 싶은 아쉬움이 남기도 한 김고로였다.


춘천에서 어느 정도 이름이 있고 지역민들에게 사랑받는 노포 막국수 집들을 다녀본 김고로는 지금껏 갔었던 막국수 집들을 떠올려보았다. 유포리, 퇴계, 남부 그리고 실비까지. 노포로 시작했지만 현재는 맛이 많이 변했다는 평을 받는 곳을 제외하면, 메밀면의 선호도를 제외하고, 동치미 육수의 기본기가 탄탄하다. 춘천에서 처음 먹던 막국수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슴슴하고 시원하며, 상큼한 순수 동치미나 실비 막국수처럼 육수를 섞은 진한 동치미 등 자신들만의 무기로 손님들을 끌어당긴다.


'다음 막국수는 또 어디로 가볼까. 맛있는 곳이 많아서 고민되는군.'


김고로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식사를 마무리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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