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흐렸다, 하지만 날이 흐리고 먹구름이 가득하다고 해서 그날의 기온이 덥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체감 온도라는 것은 온도뿐만이 아니라 습도라는 녀석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그날도 더웠다. 강릉의 새 사무소의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서울에서 출장을 와주신 K이사님, U주임님을 포함한 우리들의 일도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노동이 가득한 나날들을 짧게라도 지내게 되면 누구나, 으레 그렇듯이 점심과 휴식시간 중간중간에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식사와 간식에 대한 기대를 갖는다. 몸이 힘들기 때문에 입과 혀로 느끼는 즐거움으로라도 보상을 받고 싶은 굉장히 당연한 마음. 굳이 물리적, 육체적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 책상에 앉아서 전산, 행정적인 일을 하는 회사원이든, 집에서 가사를 돌보시는 분들이든, 직업과 노동 유형에 관계없이 점심시간과 간식시간은 항상 미식에 의한 기쁨을 기대하는 것이다. 나도, 그렇다.
"오늘 우리 뭐 먹어?"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J팀장님이 묻는다, 물론 이 질문은 나에게 하시는 질문이다. K이사님이 옆에서 한마디 거드신다.
"그래, 여기 주변에 또 뭐가 있나?"
강릉의 사무소는 물론이고 서울의 본사에서도 이미 미식가와 미식 블로거로 광고를 하고 다닌 나 자신이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이 날도 어디를 가야 할지 선택지가 여럿 준비되어 있었다. K이사님의 선호도에 맞추어 짧은 도보로 갈 수 있는 시장 노포의 한식집, 강릉의 대표적인 노포 음식은 바로 소머리 국밥이다.
강릉과 주문진에는 해안에서 맛볼 수 있는 해산물을 주재료로 한 음식들만큼이나 소머리와 소의 부속물로 국밥을 하는 소국밥집들이 많은데, 강원도에서는 횡성을 비롯해 홍천, 평창과 같이 소를 많이 키우는 편이다. 아마도, 살코기는 수도권으로 판매를 해야 하거나 비싸서 먹지 못했던 서민들이 그 부속물로 국밥을 만들다 보니 강릉에서도 소머리국밥이 많이 발달하고 그러한 식당들이 많이 생기지 않았나, 추측을 해본다.
이전에 강릉이 고향인 분들이나, 강릉에 사신지 좀 되신 분들이 전하는 강릉내의 소머리국밥집들에 대한 입소문을 들어보니 이전에는 어느 식당이 중앙시장에서 유명해져서 2호점을 낼 정도로 기세가 좋았는데 그 이후로 그러한 맛의 질을 유지하지 못하니 다른 곳을 가라고 다들 입을 모으셨다. 그래서 그 대신에 추천을 받은 소머리국밥집이 있으니 시장 안 소머리국밥골목에 있는 '임계식당'이라는 곳이었다. 임계라는 곳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강릉에서 성산면을 넘어서 갈 수 있는 강릉 근처의 산동네 중 하나인데 몇 년 전부터는 품질 좋은 사과로 유명해진 곳이었다.
"시장 안에 소머리국밥 집이 하나 있는데, 가보시겠습니까? 임계식당이라는 곳입니다."
"그래? comma군이 추천하는 곳이면 믿을만하겠어. 그럼 오늘 점심은 거기서 먹자고."
그렇게 나는 회사의 상사, 동료분들을 모시고 강릉 중앙시장의 국밥 골목으로 향했다. 그렇게 가면서도 한 가지 미리 미안한 점은, 시장에 있는 노포들은 손님들을 위한 냉방 시설이 천차만별이라서 더운 날씨에 또 습하게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밥을 먹어야 한다는 점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임계식당도 냉방시설이 그리 훌륭하지는 않아서 우리는 더위와 습기로 살짝 일그러진 얼굴로 식당 안쪽에 착석했다. 메뉴는 소머리국밥과 소머리수육이 주메뉴, 그 외에 이런저런 국밥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모두 소머리국밥과 수육을 주문했다. 그리고 지금도 생각하건대 임계식당의 소머리수육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행운이다. 워낙 더운 날이었어서 시원한 음료수를 주문해 홀짝거리면서 국밥을 기다리다 보니 역시나 한국인의 빠른 음식인 국밥이 금방 부글거리면서 우리의 식탁으로 올라왔다.
고소한 고기의 냄새와 곱게 다져진 파가 수북하게 맑은 국물에 담긴 국밥이었다. 나는 국밥을 먹기 전에 깍두기의 맛이 궁금하여 미리 젓가락을 들었다, 국밥집에서는 역시나 깍두기가 굉장히 중요한 반찬이니까.
아삭하고 말캉하게 씹히는 깍두기의 채수맛이 입안에 퍼진다, 달콤하고 약간의 매콤함이 감칠맛까지 느껴지고, 시원하다. 오래간만에 굉장히 맛있는 깍두기다, 칼국수 집에서 기본을 나오는 깍두기들 보다 약간 더 달달한 맛을 지녔지만 이 깍두기 국물을 후에 국밥을 반 정도 먹었을 때 넣어서 먹으면 무슨 맛이 날지 큰 기대가 생겼다. 아삭아삭하고 깍두기를 씹을 때마다 깍두기무와 그 물의 시원함과 달달함이 입안에 퍼져서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연거푸 끄덕였다. 국밥집을 가장한 깍두기 맛집이로구나, 나는 속으로 외쳤다.
맑은 국물과 대파를 가득 숟가락으로 떠서 입으로 밀어 넣으니 맑고 진득한 소육수의 맛이 깔끔하게 목을 넘어가고 바삭하고 부드럽기까지 느껴지는 다진 대파들의 식감이 즐겁다. 국물이 끈적거리고 숟가락에 육수가 묻어 나오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이러한 국물에는 밥을 말아서 녹말의 느낌을 더하는 것이 살짝 미안해질 정도다.
"와, 국물이 참 맑고 깔끔하니 맛나네요"
"국밥 진짜 괜찮은데요"
옆에서 이런저런 다양한 탄성과 맛에 대한 호평이 이어진다, 기분이 좋다. 사실 나는 내가 와본 적이 없는 식당에 다수의 인원을 데려오는 것을 꺼리는 편이다, 내가 내 입으로 먹어본 맛이 아닌 이상 남에게 추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도 처음 와보는 식당에서 나도 그 맛이 만족스럽고 다른 이들도 그렇게 얘기하면 참 다행스러운 것이다. 사각거리는 다진 대파들과 고슬 거리는 쌀알, 그리고 진득하고 맑은 소육수가 서로 합을 잘 맞추며 입을 즐겁게 한다. 그렇다면 이제 소머리수육은 말하지 않아도 이미 맛있겠지만, 직접 느껴볼 시간이다.
어두운 갈색으로 진하지만 영롱한 빛을 반사하고 있는 소머리 수육을 한점, 새우젓에 살짝 찍어 입으로 밀어 넣는다. 소머리 수육이 이렇게 쫄깃하고 식감이 푹신하니 좋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씹을 때마다 느껴지는 식감과 육즙이 눈이 번쩍 떠지는 수육이었다. 소머리 고기가 이렇게 맛있는 거였다고? 왜 나는 몰랐지? 살코기가 폭신폭신하게 씹히는 와중에 그 위에 붙은 지방질은 치아 사이에 붙는 느낌이 날 정도로 '쫄깃'이 아니다, '쫀득쫀득'했다. 그냥 '쫀득'이 아니라, '쫀득'을 두 번 말해야 하는 식감이다, 내 말을 이해하는가? 쫀득쫀득, 쫀득쫀득, 쫀득쫀득이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사실을 전달할 뿐이다). '쫀득쫀득'한 식감을 자랑하는 소머리의 비계 부위, 그리고 푹신한 살코기가 입안에서 구수한 맛을 뽐내었다.
내 앞에 마주 앉은 U주임님은 이미 국밥을 씹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소머리수육 그릇에서는 소머리의 비계가 붙은 수육 조각이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비계가 붙은 수육 조각을 하나 들어서 U주임님 근처에 놔드리며 말했다.
"U주임님, 이거 꼭 드셔 보세요. 소머리 수육 중에서도 이 비계가 엄청납니다."
"그래요?"
그가 빙긋 웃으며 내가 추천한 살점을 집어 들어 입에 넣는다. 그도 곧이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이 수육 정말 쫄깃하네요. 진짜 맛있네요."
그가 소머리 수육에서도 비계 부위를 먹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소머리수육의 살코기와 비계는 식감과 맛이 매우 다른 부위들이었기 때문에 꼭 경험해봐야 한다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만약 어디서든 소머리수육을 먹게 된다면 비계와 살코기의 식감과 맛을 비교해보시길.
그렇게 우리의 식사는 점점 끝으로 치달았고 국물이 반 정도가 남은 것이 보였을 때 나는 깍두기 접시에 흥건히 남아있는 깍두기 국물을 나의 뚝배기 속으로 들이붓고는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 섞었다. 소머리국밥, 육수를 깍두기 국물로 부분 교체하면서 후반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어떤 맛이려나.'
이제는 더 이상 맑지 않고 붉은색으로 물들어 농후한 국물의 맛을 뽐낼 것 같은 그 국물 속으로 나는 뛰어들었다. 숟가락이 '첨벙'소리를 내며 경기의 시작을 알린다. 그리고 그 흐름을 나의 입이 이어받았다.
"와, 쓋."
맛있어서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매콤하고 달큰한, 그 깍두기의 국물이 국밥과 만나면 시큼새콤한 맛이 부각되었지만 소머리의 육수가 부드럽고 탄탄하게 끝맛을 뒷받침해주는 감칠맛 터지는 맛. 정했다, 이 집의 소머리국밥의 후반전은 무조건 깍두기국물을 넣는 거야. 나는 오늘부터 임계식당의 깍두기 국밥을 사랑한다. 깍두기 국물을 국밥에 넣어먹는 방식을 누구나 좋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주변에서 같이 식사를 하시는 상사, 동료분들에게 추천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매우 조용히 환호성을 지르며 깍두기국물이 첨가된 소머리국밥을 끝까지 비워내었다. 부산에서 돼지국밥을 먹을 때에도 깍두기국물을 넣어먹으면 맛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임계식당의 깍두기는 국밥만큼 맛이 좋았다. 실제로 우리는 깍두기를 서너 번은 다시 달라고 하여 먹었으니까.
그렇게 그 날의 하루가 저물고 나는 그 후로 몇번 더 임계식당을 방문하여 식사를 했었다. 더운 여름 날에 뜨거운 국밥이 무슨 소리냐고 하실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 곳의 국밥은 맛있으니까, 깍두기는 더 맛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