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적인 표출이 아닌, 자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공감하고 문제에 직면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방법으로 안전하게 해소하려 한 이발사. 그가 만약 아무렇게나 표출해 버렸다면, 그는 자신이 가장 답답한 순간에 뛰쳐나가 사람들이 우글대는 시장바닥에서 폭발하듯 소리를 내질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장소를 골랐습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까지 했지요.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사실을 자신이 독점한 가십거리로 여겼다면, 고작 그런 곳에서 소리치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신념을 저버리지 않는 선에서 해결 방법을 찾은 것이지요. (보통 ‘욕망’이라고 하면 ‘탐욕스러운 마음’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욕망이란 사소하거나 도덕적인 것도 포함합니다.) 안타깝게도 대나무 숲이 바람결에 그 외침을 퍼뜨린 것은 생각지 못한 반전이었지만.......
임금도 이발사에게 무작정 귀를 보여 준 게 아닙니다. 부모인 선대 왕으로부터 '네 귀를 감추어라.'라고 교육받았다고 해도, 그를 어릴 적부터 씻기고 입히던 궁녀들이 완벽하게 함구했다 해도, 어른이 된 임금은 어느 날 용기를 내, 궁 밖의 이발사를 굳이 불러서 귀를 보여주었고, 이발사가 비밀을 누설해도 처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체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신 그대로를 받아들이기 위한, 세상에 대한 실험에 가까웠습니다.
이 이야기는 긴 귀를 가진 임금과 그걸 혼자 보고 너무 말하고 싶어 답답한 마음을 대나무 숲에서 해소한 이야기로만 보기엔 너무나 아깝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신체의 비밀과 소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표현하지 못하는 것과 자신감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도 있습니다. 신체의 비밀, 대나무 숲, 소문은 인물이 '선택'을 하고 이야기가 흘러가게 만드는 배경 혹은 도구(동화적 설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임금은 오래전부터 자신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싶어 했던 욕망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도록 계획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가졌고, 앞도 내다볼 줄 아는 인물이니까요. 얼핏 보기에 사건의 열쇠를 이발사가 가진 것 같지만, 사실은 이야기를 주도하는 힘이 임금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임금의 욕망이 사건과 맞물렸고, 사건의 해결은 임금 자신에 대한 진정한 공감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고민 끝에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본 결과지요. 만약, 자신에게 공감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태어난 자신 혹은 세상으로 화를 돌렸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를 씻기고 입히고 머리를 이발해 주면서 다음날도 살아 있는 사람은 없었겠지요.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타인의 시선이나 소문 같은 것들이었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자기 자신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언제나 문제에 ‘직면’해 ‘해결’하는 것일까요? ‘해결하려는 노력’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면, 매일 새로운 머리 스타일이나 모자를 바꾸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의학 기술만 따라준다면, 귀를 성형하려고 했겠지요. 또, 아주 까다로웠을 거예요. '벌거벗은 임금님'처럼요! 잊을만하면 퍼레이드를 하며 백성들의 반응을 확인하고, 또 신하들의 충심을 의심했을 테고.......
사실 공감한다는 건, 문제를 ‘직면하는 태도’에 더 가깝습니다. 공감은 ‘해결’보다 ‘이해’가 먼저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공감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자면,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가?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자신에게 묻고 솔직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때로는 문제를 당장 해결하는 것보다, 그 감정을 ‘인정’하고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더 우선하기 때문이지요. 문제 해결만을 목표로 하면, 정작 내가 왜 힘든지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더 효과적으로 해결하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고통을 덜어낼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나에 대한 공감은 글을 쓰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공감하지 않고,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는 이야기도 독자의 마음을 울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공감과 깊은 이해가 필요한 이유는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며, 욕망이 무엇인지 모른 채 혼란스러워하는 사람의 시선보다, 자신의 욕망을 알고 문제를 마주함으로써 한 뼘 더 성장하는 사람의 시선으로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에세이, 혹은 마음의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글을 쓸 때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글쓰기가 문제에 직면해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되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네, 맞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글쓰기는 나의 욕망을 솔직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줍니다. 딴 건 몰라도, 글 안에서는 뭐든 가능하잖아요. 뭐든 말해도 괜찮고, 큰돈 드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러니 부담없이 글을 쓰다 보면 다른 것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해 줍니다.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내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스스로 묻고 답하게 되지요.
저는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 존재의 윤곽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자아가 명확해지는 것이지요. 글쓰기를 통해 그 과정을 생생히 치를 수 있어요. 내면을 탐험하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진짜 문제'를 보게 됩니다. 어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되고, 어떤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살아가야 하겠지요. 그럴 때 자기 공감은 해결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체념이 아니라 내가 주도적으로 선택한 내면의 성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