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그래서, '그냥' 안 쓰면 어떻게 쓰라는 거야?

by 이지영

30화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내가 어떤 응어리를 풀어내고 정화시켜, 그것으로 글을 한 편 썼다고 생각해 보자. 어떤 억울한 일이나, 화나는 일, 슬픈 일에 대해.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으로 다시 돌아갔다.


이미 말했듯이, 완전히 '그럴 수도 있지!'라고 모두를 완벽히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실, 암투병 중인 아버지와 술을 한 잔 했대도, 생뚱맞게 간 건강기능식품을 나에게 건넸다고 해도, '그런 병은 못 낫는다고 봐야 한다.'라는 망언을 했대도, 아무도 직접적으로 잘못이라는 걸 하지는 않았다. 누구 한 사람을 딱 꼬집어 원망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마음의 응어리를 풀 수 있었을까? 단순히 '그게 어떻게 그 사람들 잘못이냐?'라고 따져 묻고, 또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아서 생긴 일은 아니다. 나는 이들을 더 이상 원망하지 않음과 동시에 스스로 얻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암투병 생활은 이전부터 지니고 있었던 지병에 영향을 받아 더욱 힘들었고, 생활습관과 크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치료와 간병이 생각처럼 잘 따라주지 않았다. 일상은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간병도 그랬고, 드는 돈도 그랬고, 효도도 그랬다. 엄마가 이상주의자에다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나마 오래 버텼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돌도 안된 아기를 돌봐야 하는 것이 당시 나에게 좋은 핑곗거리는 아니었는지, 가끔 생각하곤 하지만.

부모님은 나의 출산일이 다가오자 수술받으러 집을 오래 비울 일을 대비해, 조기진통으로 장기 입원해 있는 나에게 해외여행을 간다고 둘러대셨던 것이다.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었다. 내게 아기가 돌봐야 할 아기가 있는 것도, 내가 결혼을 해 부모님과 떨어져 살고 있는 사실도, 무관심해 보이는 남편과 연애를 했던 것도. 내가 결혼 전에 아버지를 속 썩여드린 것도. 나와 아버지를 둘러싼 모든 게 다 싫었던 거다.




그래서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는 이 모든 게 내 탓 같았다. 멋지게 커서 효도를 해야 하는데,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아서, 너무 안일하게 살아서, 내 잘못된 선택 때문에 엉망이 된 타이밍이 쌓여서, 아버지께 불효로 돌려드린 것 같아서.


'나는 왜 이렇게 밖에 못하고 사나?'


나는 장례식 내내 곡소리를 내며 내게 따져 물었다. 왜 집안의 대소사는 나보다 동생이 더 잘 알고, 더 잘 나서는 것 같을까? 내 인성이 그렇게 별로인가? 내가 부모님과 집안일에 무관심해 보였나? 실제로 그렇게 보였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정말 그런 인간이라고 해도.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엄마의 자책감과 쓸쓸함이 우울증이 될까 걱정돼 몇 년 동안 엄마의 집을 왔다 갔다 하며 보살폈다. 경남에서 경기도로, 이사 가기 전까지. 이사를 간 후에도 가끔 나는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마다 나의 죄를 상기했고,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나의 신세를 한탄하고 원망했다.




그렇게 둘째를 출산하고 또 시간이 3년쯤 흐른 후에, 그때를 떠올리며 글을 썼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로 내가 과거를 재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억이 사라지거나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그때의 상황들을 재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라고 따져 물었던 질문도 전혀 다른 색으로 바뀌었다.


'내가 왜 그랬지? 왜 그럴 수밖에 없었지?'


비난이나 판단을 위한 질문이 아니다. 자기 합리화를 위한 질문도 아니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그 마음에 대해 탐구하듯 알아가 보는 것이다.


'그래, 난 그냥 이런 인간인데 뭐.'라고 퉁치지 말자. 자기 합리화의 끝에는 결국 '그냥'이 나오게 되는 법이다. 비난이나 판단은 자신을 채찍질할 수는 있어도, 스스로 성장하게 도울 수는 없다. 결국 나를 다시 곪게 만드는 말이다.


치유와 성장을 위한 글을 쓰고 싶다면, '나'에 대해 먼저 공감해야 한다. '그럴 수'를 찾아보자. 없는 사실이나 과장된 이야기로 거짓 위로를 하면 안 된다. 나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나?




이런 질문에 대해 대답하려면, 스스로 구구절절 짚어나가는 과정이 변명을 늘어놓는 것 같아 구차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니 타인이 먼저 발견하고, 인정하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건 당연한 심리일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남이 그래주기만을 기다렸다가는 영영 스스로를 치유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구차하게 느껴지더라도 구구절절 글로 써보자. 내가 펼친 논리가 나를 더욱 궁지에 몰고 가더라도, 나를 살려줄 언어가 언젠가는 튀어나올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간혹 그렇게 고군분투하던 마음이 어느 철학자, 유명 강연자의 말 한마디에 큰 깨달음을 얻은 듯 마음을 녹이는 때가 올 것이다. 그것은 나의 구차하기만 한 언어에, 우리네 삶의 모습을 깊게 아우르는 언어가 다가와 재구성, 재탄생하도록 도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해보자. 우리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글쓰기를 하려는 사람들이 아닌가. 찾으려는 자에게는 더욱 그 결실이 빠르게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힘들 때보다는, 복받쳐 오르는 것들을 한 김 식혀 날려 보낸 후에 다시 직면하는 것이 좋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는데 5년이 걸렸다.




나는 아버지의 어려웠던 암투병과 그런 상황에서 내가 손을 더 보태지 못한 것이 억울하고 죄스러웠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을 겪어보면 알게 된다. 이상적인 행동들이 당연한 듯 딱딱 나오지 않는다는 걸. 지극히 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순간들을 마주하게 되면 그것을 용서해 가면서, 또 가끔은 돌파하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걸, 나도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내가 원망하던 나라는 인간, 내가 한탄하던 내 신세, 아버지와 나를 둘러싼 상황과 관련된 사람들, 이 모든 것이 완벽한 용서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눈 감고 또 어느 부분은 오히려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감사하는 마음은 내가 현실을 사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고통에 공감했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을까. 힘든 나에게 공감하고 나니,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현실을 돌파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막연한 감사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나의 행동과 마음에 누구의 탓도 하지 말고, '그냥'이라고 퉁치지도 말자. 우리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이다. 인간적이라는 말이 이상적인 것과 반대되거나, 특별한 힘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현실에 발을 딛고 의외의 힘을 발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상황과 나의 의지에 깊이 공감하는 장으로써 글쓰기를 활용하자. 누구에 의해서, 혹은 '그냥'하기 전에, 스스로 판단하고 조율해서 선택할 수 있도록 주도성을 준비하자. 우리가 글쓰기를 하는 이유는 더욱 주도적인 삶을 위해 컴퓨터의 디스크를 정리하듯, 마음을 조각모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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