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 시선 말고 ‘사적’ 시선도 있다
돌봄 교실 출근길에 어떤 아주머니를 바라본다. 운전 중이었지만 오가는 차량도 없고 사람도 없어서 2초 남짓 볼 수 있었다. 차에서 2초는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녀를 짧지 않게 바라본 이유는 뭘까. 낯선 그녀가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다리 난간의 흔한 꽃을 여러 컷으로 사진을 찍는 게 의아했다. 어떤 다리는 노란 꽃 일색이던지, 배추 같은 화초가 심어졌다. 너무 예쁘지 않은 데다가 행정인들의 비슷한 취향이 물릴 지경이다. 캐어 갈까 봐, 그런 종류만 심는 건가? 로즈마리나 라벤더 같은 허브를 심으면 걷는 걸음을 멈출 의향이 있다.
그렇게 예쁘지도 않고 흔해 빠져서 물릴 지경인 꽃을 여러 번 찍는 60대 초반의 그녀에게 내 생각을 말했다면, 발끈했을 것이다.
아이들 몇 명과 운동장에 나왔다. 모래사장에 구덩이를 파는 남자아이들은 끊임없이 물을 채운다. 물이 고여있길 바라는 마음이지만 모래 사이로 물은 사라지고 만다. 빠른 걸음으로 물을 채워놓기를 여러 번, 스밀 만큼 스미었는지 물 웅덩이가 되었다. 자그마한 물 웅덩이에 준이는 물수제비를 한다며 모로 돌을 던진다.
“옆 친구 머리 맞을 수 있으니까 조심해.”
얼마나 순수한 지 말리고 싶지 않았다. 지름 30센티미터 정도의 웅덩이에 던지는 물수제비라니, 귀여울 수밖에 없다. 개구쟁이 모습일 때는 잔뜩 잔소리만 쏟아내는 나지만, 진지한 흙놀이 후에 넘치는 웃음소리는 말간 해만큼 소중하다.
아이들에게서 옮아 붙은 장난기로 아이들을 골려준다.
“얘들아, 8분 남았어.”
똑똑 떨어지는 시간을 말해주면, 아쉬워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들이 귀엽다.
짓궂은 아이일 때는 머리를 콩 박고 싶지만 말이다.
아이도 그렇다. 단정 짓던 말썽꾸러기에게도 말간 순수함이 있다.
2020. 10. 28 내 블로그 일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