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질이 어색한 주부의 김장

무채가 두꺼워도 김장은 완성된다

by 게으른 산책가

자기 전에 다짐했다. 심지어 입 밖으로도 내 결심을 말했다.

“내일 여섯 시에 일어날 거야.”

신랑은 내게 만류했다. 그러면 내 결심은 더 공고해진다.

“안돼, 그래야 내일 저녁에 김장할 수 있단 말이야.”


하지만 다짐, 결심, 선포, 모두 소용없이 7시에 일어났다. 어제 아침에도 마찬가지였다. 9시에 장 보러 간다고 했으나 10시에 나섰다.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드는 것에 익숙하다.


아래층 할머니께서 주신 무는 일주일이 지났지만, 싱싱했다. 무 두 개를 채 썰고, 이제 하나 남았다. 엄지 손가락이 아파서 잠시 쉬는 시간이다. 스피커에서 새는 라디오를 들으니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다. 커피를 내리고 나니, 블로그를 쓰고 싶다. 무채를 썰다가, 한눈팔 일은 사방에 널렸다. 다행히 뛰쳐나가지 않았고, 손가락이 아파줘서(?) 블루투스 키보드를 냉큼 꺼내왔다.


어른이 되어서 좋은 점,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 늘어나지만 적당히 만족하며 살 수 있다면 삶이 수행이 될 수 있다. 내가 어른이라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있을까. 얼마 없는 ‘어른 경험’은 바로 지금이다. 아슬아슬한 칼날에 무채는 같은 크기로 썰어지지 않고, 굵은 무채를 발견하면 다시 반으로 썰어야 하는 어설픈 ‘칼질 er’다. 하지만 지금 내 옆엔 아무도 없다. 얼마나 다행인가. 굵은 무채와 가는 무채가 공존한다 한들, 김치 맛이 달라지는가? 달라진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올 해는 육수에 재료 하나를 추가했다. 북어 대가리를 넣어봤는데, 색깔이 아주 진하다. 오늘 밤에 만날 내 김치가 더 맛있을 거 같아 설레기까지 한다.


내가 어른이 되는 환상을 심어주는 김장, 벌써 다섯 번째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새엄마는 내 김장 김치는 열외 하고 자신의 자녀들만 담기 시작했으니, 덕분에 김장 독립을 하게 됐다. 어쩔 수없다. 김장으로 헤어진 듯한 새엄마와 나 사이, 그건 내가 만든 틈일 수 있다. 아빠가 없는 그 집에 발길이 안 닿기 시작한 것은 나부터였다.


덕분에 얻은 김장 독립으로 어른이 되는 경험을 주는 특별한 시즌이다. 다시 무채를 썰어야겠다. 벌써 20분을 키보드에서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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