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_잡학스런 공동체이야기
16_잡학스런 공동체이야기
공공지원사업의 구조적 모순과 시민활동의 제도적 변용
같은 사람, 같은 활동, 그러나 다른 이름의 사업
최근 한 자치단체에서 진행한 관련 분야의 기본계획 수립 과정에 착수보고와 중간보고 패널로 참여하게 되었다. 회의를 지켜보는 동안 지난 10여 년간 지속되어 온 각종 지원사업의 방향이 여전히 ‘적극행동그룹’ 중심의 설계 논리에 머물러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즉, 행정이 주도하는 사업 구조 속에서 활동성이 높은 일부 단체가 공모의 중심에 서고, 나머지 공동체는 주변부로 밀려나는 익숙한 패턴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담당 국장은 “투자 대비 사업의 효능감이 실제로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왔다. 그에 대한 답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함께한 패널들은 하나같이 지원사업을 넘어선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단순한 재정 투입이나 단기적 성과가 아니라, 공공이 지닌 존재 이유와 ‘공공의 1원’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가치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목소리였다. 이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공모사회는 과연 공공의 재정을 얼마나 깊이 있게 사회적 가치로 전환시키고 있는가.
그리고 그 ‘공공의 1원’은 진정으로 시민의 삶을 변화시키는 언어로 쓰이고 있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행정과 시민이 함께 새롭게 써야 할 공공의 언어라고 느꼈다.
한 지역의 커뮤니티 A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방식으로 지역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이어왔다. 이를 우리는 ‘A활동’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지방자치단체 혹은 공공기관이 ‘A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공모를 열었다. 이때 A동아리는 자신들이 하던 일을 조금 더 체계화하여 공모에 응모했고, 선정되었다. 이후 그들은 여전히 같은 활동을 했지만, 그 활동은 이제 ‘A사업’이라는 행정적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듬해, 또 다른 공공기관 B가 유사한 취지의 ‘B사업 공모’를 진행했다. A동아리는 이번에도 자신들의 활동을 ‘B사업’으로 신청했고, 또 선정되었다. 그들은 변함없이 같은 구성원, 같은 지역, 같은 목적 아래 같은 활동을 계속했으나, 행정적으로는 ‘A기관의 사업’에서 ‘B기관의 사업’으로 바뀌었다.
결국 이 공동체의 활동은 누구의 사업인가? 하는 질문이 남게 된다. 시민의 자발적 활동이 행정의 사업으로 포장되고, 행정의 사업은 시민의 자율적 실천으로 위장되는 구조 속에서 정체성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이 사례는 결코 특수한 예가 아니다. 오늘날 한국의 공모지원사업 전반이 처한 제도적 현실의 축소판이다. 커뮤니티는 공모사업을 통해 살아남지만, 그 과정에서 본래의 목적과 자율성이 흔들린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방향으로 전환해야 하는가가 지금 우리가 마주한 중요한 질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제도적․사회적․거버넌스 관점을 살펴본 후 ‘공모사회’의 한계와 전환의 필요성을 논의해 보자.
제도적 관점: ‘프로젝트화된 시민활동’의 구조
공모제도는 본래 시민사회의 자발적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고안된 행정 장치이다. 커뮤니티에서는 공모사업 만큼 달콤한 것도 없다, 그 만큼 매력적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공모사업은 공동체를 ‘프로젝트 단위’로 환원시키는 행정기술로 작동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어떠할까?
첫째, 지속성의 단절이 발생한다.
같은 활동이라도 매년 다른 기관의 공모에 응모해야 하므로, 동일한 사업이 ‘매년 새로 시작되는 프로젝트’처럼 반복된다. 이는 공동체의 활동이 누적되지 못하고, 경험과 학습이 제도적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구조를 낳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둘째, 정체성의 희석이다.
공공기관의 사업명에 따라 활동의 이름이 바뀌고, 보고서의 형식이 바뀌며, 평가기준이 달라진다. 공동체의 본래 가치나 철학보다 사업의 틀에 맞춘 언어가 우선되면서 시민활동의 주체성이 약화될 가능성도 매우 높다 .
셋째, 성과관리 중심의 행정 구조가 문제이다.
기관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참여시켰는가’, ‘언론에 몇 번 보도되었는가’와 같은 양적 지표를 중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표는 공동체의 변화나 사회적 관계망의 질적 성장을 반영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시민활동은 ‘행정적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는 프로젝트형 공동체로 변해 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회학적 관점: 공공성의 외주화와 커뮤니티의 관료화
이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보면, 이는 ‘공공성의 외주화’(outsourcing of publicness)라 할 수 있다. 국가나 지방정부가 수행해야 할 공공적 과제를 ‘공모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시민에게 위탁함으로써 공공성이 ‘위탁된 형태의 공공성’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시민은 더 이상 문제 해결의 주체가 아니라, 행정의 과업을 수행하는 하청자로 위치 지워진다. 행정은 공모를 통해 시민의 자발성을 ‘관리 가능한 사업단위’로 포섭하고 시민은 지원금을 받기 위해 행정의 언어와 절차에 순응한다.
이로써 커뮤니티는 ‘참여적 조직’에서 ‘관료적 조직’으로 변모한다. 보고서, 정산, 실적, 홍보물은 행정적 합리성을 위해 요구되지만, 그 과정에서 공동체의 감정적 유대나 삶의 리듬은 서서히 사라진다. 또한, 공모사업은 경쟁의 내면화를 조장한다. 커뮤니티들은 동일한 지역과 문제를 다루면서도 서로 협력하기보다, 한정된 재원을 두고 경쟁해야 한다. ‘함께 사는 사회’가 아니라 ‘선정 받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공동체의 연대보다는 분절을, 자율성보다는 종속을 강화한다.
거버넌스적 관점: 협력의 부재와 수평적 관계의 실종
공공기관과 시민단체의 관계는 원래 협력적 거버넌스로 발전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의 공모체계에서는 여전히 수직적이고 단선적인 행정-시민 관계가 반복된다. 이러한 결과는 다음과 같이 예측된다.
첫째, 참여의 수준이 낮다.
주민들은 정책을 공동 기획하거나 평가하기보다, 이미 설계된 사업의 ‘집행자’ 역할에 머문다. 윌콕스의 참여사다리로 본다면, ‘정보제공’ 혹은 ‘실행참여’ 단계에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둘째, 다층적 거버넌스 구조의 부재이다.
하나의 지역에서 여러 기관이 유사한 사업을 중복 지원하지만, 이들 간의 조정 메커니즘이 없다. 주민 입장에서는 A사업과 B사업이 다를 바 없지만, 행정적으로는 서로 다른 사업체계로 분절되어 있다.
셋째, 공공성의 연계 실패이다.
지역사회 전체가 여러 기관의 ‘사업묶음’으로 파편화되고, 각 기관은 자기 사업의 성과만 관리한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통합적 비전이 부재한 채, 지역의 공공성은 행정적 단위로 나뉘어 사라진다.
종합적 해석: ‘공모사회’의 한계와 전환의 필요
이 모든 현상은 한국 사회가 이미 ‘공모사회(Contest Society)’라는 체제 속에 들어와 있음을 보여준다. 이 사회에서 공공의 문제는 공모로 해결되고, 시민의 참여는 심사와 평가를 통해 제도화된다. 공동체의 창의성은 행정의 프레임 속에서 포획되고, 행정은 이를 통해 ‘참여의 성과’를 확보한다. 결국 공모사회는 시민과 행정 모두에게 편리하지만 불모적인 공생체계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공모를 넘어 공동 기획(co-design), 공동 학습(co-learning), 공동 실행(co-creation)으로 나아가야 한다. 공공기관은 심사자가 아니라 파트너이자, 시민은 수혜자가 아니라 공동 설계자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행정은 사업의 성과보다 관계의 지속성을 유지하여야 하며, 시민은 자율성보다 협력의 구조를 중시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공공성과 시민성이 만나 지속 가능한 협력적 거버넌스가 형성된다.
결론: 공공의 재구성과 공동체의 회복
A동아리의 사례는 단지 하나의 사례가 아니라, 오늘날 한국 사회의 공공지원체계가 어디까지 제도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징후이다. 이 문제는 행정과 시민의 갈등이 아니라, 공공성의 의미를 어떻게 새롭게 재구성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진정한 공공은 행정이 독점하거나, 시민이 위탁받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드는 과정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공모사회에서 공동체사회로의 전환은 행정의 개혁이자, 시민사회의 성찰이다.
이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누구의 사업인가?”가 아니라 “이것은 누구의 삶인가?”라고...
공공사업이 다시 삶의 맥락 속에서 공동체의 언어로 회복될 때, 비로소 시민사회는 진정한 의미의 공공성과 자율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https://youtu.be/AHIU-ZJIx-k?si=s2io98FPPRnfuz7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