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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동현 Feb 14. 2023

 효율성과 현실성으로 날 밟지 말라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은 나의 독백 

후배가 책방을 냈다.  이곳은 마음의 상처를 상담하고 책으로 처방한다. 

현직 판사가 쓴 책을 선물 받았다. 오기 귀찮고 볼 것 없는 내 전시에 늘 찾아와 감상과 선물, 지원금을 후배는 주고 갔다. 후배의 창업에 근사한 선물을 할 능력이 내겐 없다.

그저 감사한 마음을  책을 읽은 후 나의 생각이 어떤 변화를 하고 있는지를 보고하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현하고자 한다.

여러 소제목에 맞춰 나의 뇌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여주는 것을 통해 그 후배의  실험에 기꺼이 밑거름이 되고자 한다.


<인간혐오>(7~14쪽)

문유석 판사는 이 책의 시작을 인간 혐오라는 장으로 시작한다. 자신은 사람들을 뜨겁게 좋아하는 편도 아니며 오히려 인간 혐오증이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판사는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사회에서 개인주의자로서 자신의 처신을 말한다. 

"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투사가 되기 싫으면 연기자라도 되어야 하는 거다." "타인들이 원하는 연기를 잠시 해주면 내 자유가 더 확보된다는 걸  일찍 영악하게 깨친 거다."

이런 처신으로 적당히 좋은 평가도 받고 모나게 대립하지 않으면서 사회생활을 그럭저럭 잘 해와 지금은 나름 어느 정도 싫은 일은 안 할 수도 있는 여유도 생겼다고 한다.

이렇게 판사가 고백한  이유는  자신의 글에 이런 성향이 배어 있음을 미리 독자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문유석 판사가 추구하는 개인주의 상은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서로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들이 북적대는 술집같은 사회이다. 즉 서로 살아온 배경과 생각이 다르다는 차이에 대한 인식이 주는 공존과 타협이다. 전체에 맞추기 위해 내게 뭘 요구하거나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하는 것이 없는 그저 서로 다른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임동현, 시·흔적·집적, 78,8 x 109,0cm, Mixed media ,2018{판화가 오윤의 ‘노동의 새벽’에 대한 오마주)

타인의 삶에 쉽게 엮기기 싫은 이 판사에게도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마주하는 울컥하는 순간이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자신의 삶이 우선인 개인주의자 임에도  그 순간을 글로 쓰고 있다고 한다. 

개인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음에도 사회에서 마주하는 공통의 경험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적고 있다. 그 공통의  경험이란 불의한 것,  안타까운 것, 슬픈 것이고 이 책은 사회에 대한 개인주의자로서의 생각을 적은 것이다. 

사회적 존재, 사회적 기여도, 사회적 지위, 능력 등 모든 면에서 문유식 판사는 모든 면에서  현실적으로 나와 비교되지 않는 월등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내 생각을 해부하기 위해 판사의 글에 대한 내가 걸어왔던 자취와 생각을 비교해 본다. 어쩜 이런 비교를 통해 현실의 격차가 어떻게 발생되었는지를  잘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낳은 문장> 문 판사의 글에 대한 내 생각, 자취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적어 봤다. 

생각을 낳는 문장

"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투사가 되기 싫으면 연기자라도 되어야 하는 거다." "타인들이 원하는 연기를 잠시 해주면 내 자유가 더 확보된다는 걸  일찍 영악하게 깨친 거다."

 글에 비춰 보면 나는 무모했거나, 멍청했던 것 같다.  나는 문유식 판사처럼 현명하게 싫은 일이라도 둥글 둥글 연기해가면서 궁극적으로 자신의 자유를 확대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극과 극적인 대응을 했다. 싫은 사람과 일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혐오를 표현했다. 한편으로는 싫은 것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참으면서 인내의 한계가 도달했을 때 이를 미련스럽게 폭발시켰다. 

그렇다고 나는 투사가 되지도 못했다. 투사가 되기엔 내 사회적 능력과 힘이 부족했다. 투사는 싸워서 이길 힘이 있을 때 투사이지 패배가 분명할 정도의 처지에서는 투사가 되고 싶어도 될 수 가 없다.  죽으면 끝이니까. 

돌이켜 생각하니 투사이고 싶었으나 투사가 되지 못한 나는 투사의 동경을 버리지 못한 채 미련하게 현실과 끝없는 부조화속에서 살았다. 

타인이 무엇을 원하는 지에 대한 관심보다 그냥 내 길을 어떻게 갈 것인가를 생각하고 추구하는 것이 내 세계관이 된 듯하다. 

문유식 판사는 동시대에 사람들에게 드리고 싶은 글을 드라마속 대사를 인용해 적고 있다. 

" 장금아, 사람들이 너를 오해하는 게 있다. 네 능력은 뛰어 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 데 있어. 모두가 그만두는 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시작 하는 것, 너는 얼음 속에 던져 있어도 꽃을 피운 꽃씨야.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


문판사는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어"라며 알아주는 마음이 필요한 시대라고 말한다. 

쉬지 않고 가는 것! 다시 시작하는 것! 

'나'라는 미련이가 현실에서 아직까지 존재하는 이유는 '가는 것'과 ' 다시 시작하는 것'에 있지 않을까? 

쉬지 않고 갈 만큼 부지런 하지 못하지만 포기않고 다시 시작하는 비효율의 극치로 살아온 것. 

내가 깨져 버리지 않았던 것이 그 비효율과 미련의 결정체였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어"라며 알아주는 마음까자는 필요하지 않더라도 효율성과 현실성, 사회적 지위로 날 밟아대지 않았으면 좋겠다. 알아주는 마음은 아니더라도 나도 누군가의 시작을 가로막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포기를 낳도록 유도하는 것도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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