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너무도 늦었던 늦여름은 가고, 촉촉한 시월의 가을비가 초록 대지를 적시고 있다. 아파트 단지 안에 조성된 식물 나라 탐험을 떠나본다. 동물은 강아지, 고양이 등등 웬만하면 알아보는데, 식물은 꽃, 풀 그리고 나무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물론, 찬 겨울 지나 목련이 가장 먼저 봄을 알리면 목련을 알아보고, 벚꽃이 활짝 폈을 때는 벚꽃을 알아보지만 이 식물 친구들이 꽃을 감추고 푸르름으로 여름을 나고 단풍을 지나 겨울을 견디는 동안 나는 그 친구들을 잊고 산다. 얘가 봄에 찬란하게 꽃을 피운 친구인지, 여름에 화려한 꽃으로 우릴 즐겁게 해 주었는지, 수면 내시경에서 깨어난 듯, 기억이 싹 지워져 버린다. 하지만 오늘은 AI 친구를 대동하고 나서는 길이라 알쏭달쏭 식물 친구들이 두렵지 않다. 이제, 그 첫 만남은 헷갈리듯 흔들리듯 억새와 갈대부터였다.
- 헷갈리듯, 흔들리듯 — 억새와 갈대
비가 내린다. 커다란 파란 우산을 들고 101동 문을 나선다. 공기에는 눅눅한 흙냄새와 가을의 냉기가 서려있다. 101동 왼편으로 돌아 나자 봄의 붉은 주인공 '연산홍'이 비 내리는 화단을 지키고 있다. 107동 앞엔 새털 같은 은빛 꽃 가지런히 솟아난 ‘억새’가 빗줄기에 몸을 흔든다. 길가와 들녘에서 늘 보던 친구지만, ‘억새’인지 ‘갈대’인지 늘 헷갈렸다. 습지의 보랏빛은 갈대, 들녘의 은빛은 억새. 그렇게 단순한 구분이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그 차이가 뚜렷이 보인다.
그리고 억새와 나란히 서서 눈길을 끄는 친구, 커다란 강아지 풀 같은 '수크령'이 보인다. 이 친구는 생김새가 딱 강아지풀이라 절반은 이미 눈치챘던 셈이다. 편의점 앞 광장의 중앙에는 ‘청단풍나무’가 중심을 딱 잡고 나를 맞는다. 그래도 이 친구는 잎새의 생김이 딱 단풍잎 모양이라 알아보기는 했다. 107동의 뒤편으로 돌아 놀이터 쪽으로 가니 제법 커다란 나무 친구가 저층 베란다를 가리며 서 있다. 이 친구는 누구일까. AI 친구를 마술램프의 지니처럼 불러낸다.
- 벚꽃의 여름옷을 알아보다
"뭐? 벚나무라고? 아니 얘가 그 화려했던 벚나무라고? 크.~"
「화려했던 벚꽃나무에게」
온 세상이 너의 것인 양
산천을 붉게 물들이고
하늘하늘 바람을 타던 너
어느새
네 하얀 꽃잎은
겨울 눈꽃이 되어 흩날리는구나
하지만 괜찮아
떨어지는 꽃잎은 부는 바람을 탓하지 않아
불규칙한 몸짓으로 여름을 재촉할 뿐
이제 내년 사월이 올 때까지
까맣게 잊고 지내겠지
너의 존재를
네가 화려했던 벚꽃나무였다는 것도
네 가지에 수북했던 마법의 잎새도
그래도 괜찮아
화려한 너의 자태는 사진 속에 담아뒀으니
모두가 사랑하던 너의 화려한 사월을
기억의 세포 안에 깊이 새겨두었거든
잘 가렴,
인고의 계절을 건너
다시 사월에
활짝 우릴 찾아주렴
사월의 온 세상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그가, 하얀 꽃잎을 흩날리고 초록 옷을 입자 나는 또다시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지난 사월에 '그를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헌정시도 남겨두었지만, 역시나 소용이 없었다. 옆에 서 있는 '청단풍나무'는 그 잎새의 모양으로 단풍이구나 싶었는데 '벚나무'는 워낙 봄철의 인상이 강해서 그 외 계절에는 재빨리 알아채질 못했다. 놀이터 담장에는 '수크령'이 밤마실 나온 강아지라도 꼬시려는 듯 산들산들 흔들리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 화살나무, 붉은 잎의 고고함
가을이 깊어질수록 단지의 색은 점점 잿빛이 되는데, 유독 한 자리에 붉게 서 있는 친구가 있었다. 108동과 112동 사이 내리막 길 옆 철제 울타리 뒤에는 대략 2미터가량의 키로 잎새가 살짝 붉은 물이 들어가는 '화살나무'가 군락을 이루며 울타리를 지키고 있다. 줄기에 화살깃 같은 날개가 달려 이름 붙었다. 이 아파트 단지에 이사 온 6년 전, 그때부터 이 나무의 이름이 늘 궁금했다. 어느 찬바람 불어오는, 대부분의 나무와 풀들이 갈색으로 바뀐 11월에 홀로 새빨간 잎을 드러낸 채 고고하게 서 있는 모습은 소위 '군계일학'이었다. 꽃도 아니고 나뭇잎이 빨갛게 물들어 있으니 포털 검색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AI 친구의 도움으로 알게 된 그 이름 '화살나무'.
「화살나무」
몰아치는 찬바람에도
바스락, 낙엽이 건네는 속삭임에도
붉은 잎 고이 간직한 채 선
고고한 그대
붉은빛은 다들 가고 없는
이 황량한 회색 계절에
그대는 차가운 화살줄기 간직하고
홀로 이 겨울을 맞서는구나
지난여름 푸르디 푸르렀던
그대의 화살잎새는
찾지 못한 과녁을 향해 떠돈 흔적일까
지나간 청춘의 아쉬움일까
회갈색 가득한 어둠 속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붉은 자태
곧 그대마저 가버리면
지난여름의 태양과
초록 계절의 자연을
뉘와 함께 기억할까
바람에 흔들리는 붉은 잎새들이
빨간 아쉬움 뚝뚝 흘리는구나
내가 화살나무를 인상 깊게 본 곳은 관리소 앞에 꾸며진 정원에서였다. 내 산책길의 필수 코스였던 관리소 앞 정원을 걸으며 자그마한 나무다리를 지나다 보면 '배롱나무' 옆에 빨간 잎을 뚝뚝 흘리고 있는 자태가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늘 가을이 오면 이 나무 사진을 꼭 찍곤 했었다. 관리소 앞 정원에서 인상 깊었던 '화살나무'였지만 막상 그 이름과 특징을 알게 되니 단지 내 곳곳에서 '화살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의 차이는 컸다. "아는 만큼 보인다" 더니 역시!
- 배롱나무와 팽나무, 그리고 목련의 침묵
관리소 앞 정원에는 '배롱나무'라는 안내표지가 붙어 있는, 줄기가 매끌매끌한 인상적인 나무를 만날 수 있다. 이름이 적혀 있으니 몰라볼 것은 없었다. 이 나무에 분홍빛 꽃이 피는데 백일동안 피고 지고를 반복하여 '백일홍나무'라고 부르다가 '배롱나무'로 변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배롱나무는 나무대로, 백일홍 꽃은 꽃대로 함께 알아보지 못하고 단지 내 정원을 몇 년째 돌아다니고 있었다.
관리소 앞 정원에서 만난 또 다른 친구가 있다. 나무에 대한 조예가 얕으니 좀 특색 있다 싶으면 AI 친구에게 물어보게 된다.
"친구~! 이 나무 혹시... 느티나무야?"
"삐리삐리빅~. 이 나무는 '팽나무'입니다."
대충 찍었는데 AI 친구는 이 나무를 '팽나무'라고 했다. 아, 그 '우영우의 팽나무' - 이름만큼은 낯익은 친구였다. 그리고, 관리소 앞 정원을 한 바퀴 돌다 보면 103동 앞에 곧게 뻗은 둥글넓적한 잎을 가진 친구가 보인다. 가지 밑동에는 이끼가 잔뜩 끼어 있어 세월의 흔적같이 느껴지는 나무. '얘는 누굴까?' 추운 겨울을 지나고 누구보다 먼저 봄이 오고 있음을 하얀 꽃으로 알려주는 '목련'. 하지만 나는 꽃을 품지 않은 목련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임 쏘리~.
- 느티나무 아래의 쉼
이제 산책길의 끝자락, 느티나무의 그늘 아래에서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112동과 113동 사이를 걷다 보면 커다란 키가 아파트 4,5층에 다다른 잎새가 깻잎을 닮은 뾰족뾰족한 톱니를 가진 한 나무들을 만나게 된다. '느티나무'. 친숙한 이름이었지만 막상 길에서 만나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소나무, 은행나무 다음으로 많다는 '느티나무'가 우리 단지의 상층부 고공을 '소나무'와 함께 지키고 있었다.
후문과 113동을 지나다가 동그란 사과를 닮은 열매가 달린 나무를 만났다. 대추알 정도의 크기에 모양은 꼭 사과를 닮은 이 나무는 101동 앞 공원에서 자주 만나던 친구인데 가을이 깊어지면 초록 열매가 빨갛게 익어 아주 조그마한 사과처럼 보이게 된다. 버스를 타러 나가던 출퇴근길에 늘 만나게 되어 '화살나무' 만큼 관심이 높던 친구인데 역시 열매모습에서 떠오르는 이름 '꽃사과나무'였다. 이제 더 잘 알아볼 듯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으니.
- 회양목과 측백나무, 흔하지만 묵직한 존재
이제 109동과 106동 앞 놀이터를 지나가고 있다. 놀이터와 산책길의 경계 화단에는 키가 작고 작은 잎들이 동글동글한 초록 열매를 품고 서로 엉켜 자라 있는 흔히 볼 수 있는 나무가 보인다. 울타리 등에서 흔하게 만나던 나무로 '회양목'이라고 하는데, 곁에 있는 '측백나무'와 함께 익숙하지만 별 관심 없던 나무 친구였다.
회양목은 질서의 초록, 측백나무는 향의 초록.
흰말채나무는 겨울의 불빛, 줄사철나무는 겨울의 이불.
계속 후문 쪽 놀이터를 지나 106동 옆 공원으로 가다 보면, 하얀 꽃 같은 '흰말채나무'가 등장한다. 잎새 위에 얹힌 하얀 열매가 인상 깊어 기억에 남던 나무였다. 여름 지나 가을인 지금은 청색의 줄기에 잎이 무성해 알아보지 못하지만, 겨울이 되면 줄기가 빨갛게 변한다고 하니, 이번 겨울에는 꼭 '흰말채나무'의 빨간 줄기를 살펴봐야겠다.
- 계절이 공존하는 풍나무와 칠엽수(마로니에) 나무
이제 단지 내 식물탐험의 마지막 106동의 끝자락 공원에 들어섰다. 공원에 들어서자 왼편 106동 베란다 쪽으로 줄지어 서 있는 특이해 보이는 잎새들 가진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푸른 잎새와 다 말라 갈색으로 변해버린 잎새를 함께 가진, 마치 여름과 가을, 겨울이 함께 공존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헤이 AI 친구~. 푸른 잎과 아직 겨울도 안 됐는데 벌써 말라비틀어진 잎이 같이 있는 얘는 누구야?"
사진과 함께 이 나무의 이름을 AI 친구에게 물어보자,
"와, 정말 재밌는 장면을 잘 포착했네.
이 나무는 풍나무(=풍년나무, 학명 Koelreuteria paniculata)야.
내가 예전에 한 번 언급했던 적 있을 거야 —
바로 ‘풍선 같은 열매 주렁주렁 달린 나무’로 기억될 그 녀석이지"
하고 알려준다.
'풍나무' 한국에서는 단풍나무에 속하는 이 나무의 열매가 풍년에 많이 맺히길 바란다고 '풍년나무'라고도 부른다 한다. 갈색으로 말라가는 주머니들이 '풍나무'의 열매주머니라고 한다. 가을에 기온이 낮아지면 잎에 붉은색 색소인 안토시아닌이 생성되어 잎이 붉게 변한다고 하니 계절이 조금 더 지난 후에 '풍나무'인 줄 알고 만나면 더 반가울 듯하다.
106동 앞의 '풍나무' 바로 옆에는 커다란 손바닥 같은 5~7개의 길쭉한 잎이 펼쳐져 모인 '칠엽수(마로니에 나무)'가 등장한다. 프랑스의 가로수로 유명하다는 '칠엽수(마로니에 나무)'는 나무를 몰라도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바로, 대학로에 있는 '마로니에 공원' 그리고 1994년 '칵테일 사랑'이라는 곡으로 인기를 끌었던 혼성그룹 '마로니에'의 명칭에서 들어왔던 이름이었다.
- 감나무와 줄사철나무, 푸름의 끝에서
공원과 도로가 닿는 즈음에 그리 크지 않지만, 곧게 뻗은 가지와 넓은 잎을 가진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아, 또 모르는 나무를 만났다. 이번에도 AI 친구가 곧 답을 준다." 감나무, 어린 '감나무'라고 한다. 크~.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는 많이 봤고 모를 리 없지만 감이 달리지 않은 아직 어린 감나무는 역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월이 한참 지나간 후 이 공원에 감이 주렁주렁 열리게 될까? 그 감나무 옆에 줄기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인상 깊은 녀석이 보였다. 폭포수처럼 자라 비탈면 덮개용이나 경계식재로 많이 쓰인다는 '줄사철나무'는 겨울에도 푸른 잎은 간직한다고.
아파트 단지 내에서 무심히 지나치며, '풀', '꽃', '나무'의 세 가지로만 부르던 식물 친구들이 다양한 수종과 다양한 특성으로 식물군락을 이루고 있음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꽃이 있을 때도, 잎만 무성할 때도, 앙상한 겨울일 때도 —
그 친구들의 푸르렀던 봄과 화려했던 가을을 기억하리라.
- 끝 -
// 2025.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