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편 헌문(憲問) 제11장
공자가 말했다. “맹공작은 진(晉)나라의 조씨나 위씨 가문의 가로(家老)는 될 만하지만 등나라나 설나라의 대부가 될 그릇은 못된다.”
子曰: “孟公綽爲趙魏老則優 不可以爲滕薛大夫
자왈 맹공작위조위노즉우 불가이위등설대부
맹공작(孟公綽)은 앞서 성인(成人)의 경지를 언급할 때 사심 없는 인물로 언급된 노나라의 대부입니다. 맹손 씨의 7대 종주인 맹효백 때 그 아래서 활약한 인물이니 공자보다 한 세대 위의 인물입니다. ‘춘추좌전’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딱 한차례 등장합니다.
‘노양공 25년 조’에 제나라의 집정대부 최저가 1년 전 맹효백이 제나라를 공격했던 것에 대한 보복으로 노나라 북쪽 변경으로 쳐들어옵니다. 조정에서 대책회의가 벌어지자 맹공작이 나서 “최저는 다른 뜻을 품고 있기에 군사행동을 오래 할 리가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고 진언합니다. 실제 최저는 군사를 바로 돌려간 뒤 얼마 후 주군인 제장공(齊莊公)을 시해합니다. 제장공이 최저의 후처인 당강(棠姜)과 불륜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시집 간 여동생과 불륜을 즐기다가 매제인 노환공을 암살한 후환으로 결국 비참하게 시해된 제양공과 같은 운명을 맞은 셈입니다.
맹공작은 어떻게 최저가 역심을 품고 있었던 것을 알았던 걸까요? 아마도 첩보부대의 수장을 맡고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노나라의 이웃국가로 강대국인 제나라 권부의 내밀한 속사정을 훤히 꿰고 있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가 사심 없는 사람이란 평판을 믿고 은밀한 첩보수집을 맡기지 않았나 합니다. 사실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나 미국의 중앙정보부(CIA) 같은 정보기관의 수장이 수도사 같은 인물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심이 없긴 하지만 병적인 충성심으로 인해 오히려 더 기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공자의 평가로 미뤄보건대 맹공작 역시 그런 인물 아니었나 싶습니다.
춘추시대 강대국은 크게 넷으로 봐야 합니다. 동방의 제나라, 북방의 진(晉)나라, 남방의 초나라 그리고 서방의 진(秦)나라입니다. 그에 비해 오월동주(吳越同舟)로 유명한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는 짧고 굵게 명멸했습니다. 4대 강국 중 하나인 북방의 진나라의 조씨와 한씨는 노나라의 삼환 같은 권문세족이었습니다. 이들의 힘이 계속 커져 결국 공자가 죽은 직후 진나라는 이들 권문세족이 세운 조(趙) 한(韓) 위(衛) 세 나라로 분열됩니다. 진나라가 워낙 강대국이었기에 이들 세 나라가 모두 전국 7웅에 들어갈 막강했습니다.
반면 등(滕)나라와 설(薛)나라는 약소국을 대표합니다. 중국 동부 산둥성 일대에 위치해 노나라와 가까웠고 나름 역사도 오래됐지만 제나라는 물론 송나라와 노나라 같은 중위권 국가로부터 냉대와 괄시를 받아오던 나라였습니다. 실제 등나라는 기원전 414년 월나라에 의해 멸망됐다가 한차례 복국 되지만 기원전 3세기경 송나라에 의해 멸망됩니다. 설나라 역시 기원전 418년 제나라에 의해 점령 돼 속국이 됐다가 결국 기원전 323년 제나라에 통합됩니다.
당시 맹공작에 대한 평판이 좋았던 듯합니다. 공자 역시 그가 사심이 없는 불욕(不欲)한 사람임을 인정했으니까요. 하지만 공자는 당대의 평가의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잣대로 맹공작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내립니다. 진나라 같은 강대국 대신들의 가로(家老․영지를 다스리는 가신의 수장) 정도는 할 수 있을지언정 아무리 소국이라도 해도 일국의 대부를 맡기엔 역량이 미치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맹손 씨네 가로면 몰라도 노나라의 대부는 가당치 않은 직분이라는 평가를 돌려 말한 것입니다. 인물평하기 좋아하는 자공에게 핀잔을 주긴했지만 공자의 인물평 또한 이렇게 부드러운 듯 매서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