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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Dec 28. 2023

질문 말고 답에 집중하라

2편 위정(爲政) 제5장 & 제6장

  맹의자가 효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어기지 않는 것이다." 

  번지가 공자를 모시고 수레를 몰 때 공자께서 그에게 말했다. “맹손이 나에게 효에 대해 묻기에 내가 어기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번지가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까?"라고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살아계실 땐 예로써 섬기고, 돌아가시면 예로써 장례를 치르고, 예로써 제사 지내는 것이다.”     

  

  孟懿子問孝. 子曰: "無違." 

  맹의자문효   자왈   무위

  樊遲御, 子告之曰: “孟孫問孝於我, 我對曰: '無違.'” 樊遲曰: “何謂也?” 

  번지어   자고지왈    맹손문효어아,  아대왈   무위     번지왈    하위야

  子曰: “生, 事之以禮. 死, 葬之以禮, 祭之以禮.”

  자왈    생  사지이례  사   장지이례  제지이례          

  

  맹무백이 효에 관해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들지 않을까 그것만을 걱정한다."     

  

  孟武伯問孝. 子曰: “父母唯其疾之憂.”

  맹무백문효   자왈    부모유기질지우


  

  삼환 가문의 하나인 맹손 씨 가문의 종주들이 잇따라 등장해 효에 대해 질문합니다. 먼저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제5장에 등장하는 맹의자(중손하기)는 맹손 씨 가문의 9대 종주이면서 공문의 제자이기도 했습니다.

     

  ‘춘추좌전’에 따르면 노소공 7년(기원전 535년)에 숨을 거둔 8대 종주이자 아버지인 맹희자의 유훈을 쫓아 동생인 남궁경숙(중손멸)과 함께 공자의 제자가 됩니다. 맹희자는 공자에 대해 “성인의 후손”으로 특히 예에 통달한 “달자(達者)가 될 사람”이라며 “두 아들이 그를 스승으로 삼고 섬기면서 예를 익혀 그 지위를 지킬 수 있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공자는 그런 맹의자에 대해 “잘못을 능히 고칠 수 있는 사람이 군자다. ‘시경’ 소아 ‘녹명(鹿鳴)’ 편에 ‘군자시측시효(君子是則是效)’라 했는데 맹희자는 칙효(則效)할 만 사람이다”라고 평했습니다. ‘녹명’은 사슴이 운다는 뜻의 시입니다. 사슴은 먹이를 발견하면 울음소리로 배고픈 다른 사슴을 불러 먹이를 나눠 먹는다고 합니다. 그 상생의 덕을 본받아 임금이 신하들을 위한 연회를 베푸니 신하들은 그 답례로 임금에게 덕행을 권하는 정경이 그려진 시입니다. 

    

  공자가 언급한 구절은 2연에 나오는 “백성을 낮춰 보지 않으니 군자의 본보기가 되고 모범이 되네(視民不恌, 君子是則是傚)”입니다. 傚와 效는 똑같이 ‘본받다’는 뜻을 갖습니다. 따라서 공자의 발언은 “맹의자는 능히 잘못을 고칠 줄 알기에 군자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찬사를 보낸 것입니다. 

     

  문제는 기원전 535년이면 공자 나이가 열일곱 일 때입니다. 맹의자가 종주 자리를 이어받을 나이라면 얼추 스무 살은 됐을 테니 공자보다 나이가 많았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자의 제자가 됐다는 것이 얼른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사마천의 ‘중니제자열전’에도 맹의자의 이름은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맹의자는 노소공이 삼환의 영수였던 계환자를 제거하려 할 때 계환자의 편에 섬으로써 노소공의 실각과 망명을 초래하게 한 장본인입니다. 또 노소공의 동생으로 그 뒤를 이은 노정공 때 공자가 벼슬길에 나서 추진한 ‘삼도도괴(三都倒壞)’가 무산된 것도 맹손 씨 가문이 성읍의 성벽 허무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인데 당시 맹손 씨의 종주가 맹의자였습니다.  

    

  이를 종합하면 맹의자가 공문의 정식 제자가 됐다기보다는 예와 관련한 맹의자의 자문에 공자가 응하는 관계 정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로 인해 삼환 가문 중에선 비교적 공문에 가깝긴 했지만 그렇다고 공자의 대의를 쫓는 것도 아니어서 불가근불가원의 사이였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맹의자가 효에 대해 묻자 공자가 “어기지 않는 것”이라고 답한 점입니다. 춘추좌전의 기록과 비교하면 공자를 스승으로 섬기라는 아버지 맹희자의 유훈을 어기지 말라는 취지의 발언이라 해석 가능합니다. “능히 잘못을 고칠 줄 알기에 군자의 모범이 된다”는 공자 발언까지 상기시키면서 공자의 대의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의 해석입니다.   

   

  문제는 공자가 부연 설명한 대목에 있습니다. ‘춘추좌전’의 기록에 따르면 맹의자는 노애공 14년(기원전 481년) 숨집니다. 공자가 천자주유를 마치고 노나라로 돌아오고 3년 뒤이자 공자가 숨지기 2년 전입니다. 그 무렵 공자의 수레를 몰던 제자가 번지였습니다. 공자는 왜 번지에게 맹의자와 나눈 대화를 언급하며 부연 설명했던 것일까요? 

    

  혹여 다산처럼 추측하는 사람이 생길까 걱정돼서일까요?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부친인 맹희자의 유훈을 따라 나의 가르침을 받으라고 촉구한 것이 아니다. 부모를 섬김에 있어 예에 벗어나는 짓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맹희자의 유언을 다시금 뜯어보면 의미심장한 대목을 발견하게 됩니다. 맹희자는 노소공을 모시고 초나라를 방문했을 때 예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의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던 것을 크게 자책하며 “예는 인간의 근본으로 예를 모르면 자립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두 아들이 예의 달자로 알려진 공자에게서 예를 배우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모를 섬김에 있어 예에 벗어나지 말라는 것 또한 맹희자의 유훈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말과 상통한다는 것입니다.  

    

  공자의 발언은 당시 삼환이 경대부 반열에 있으면 천자나 제후에게만 허용된 의례를 함부로 행하는 참월(僭越)을 비판한 것입니다. 계강자가 태산에 올리는 산신제를 감행한 것(2편 ‘위정’ 제24장)과 계손 씨 종주의 행차에 천자에게 허용된 팔일무를 추게 한 것(3편 ‘팔일’ 제1장) 그리고 삼환 가문이 자신들 조상에 제사를 올리면서 주나라 왕실 제사에서 부르는 ‘옹(雍)’이란 노래를 부른 것(3편 ‘팔일’ 제2장)이 다 그에 해당합니다.   

   

  즉, 이 장에서 공자 발언은 단순히 효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당시 노나라 실권자들에 대한 정치적 비판인 것입니다. 맹의자에게 아버지 맹희자의 유언을 환기시키면서 “왜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지 않고 예에 어긋나는 짓을 벌이는가, 유훈에 어긋나는 짓을 벌이지 말라”고 촉구한 것입니다. 이로써 맹의자에게 직접 한 말과 번지에게 한 부연 설명이 하나로 합치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6장에 등장하는 맹무백(중손체)은 맹의자의 아들로 맹손 씨의 10대 종주입니다. ‘춘추좌전’의 맹유자 설(孟孺子 泄)과 동일인인데 ‘맹손 씨 가문의 젖먹이 대부 설사똥’이라는 함의가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도 다혈질에 경솔하고 도량이 좁아 공자가 죽고 난 뒤 노애공과 관계가 틀어지자 그 축출에 앞장섭니다.   

   

  그런 맹무백이 효에 대해 질문하자 전혀 다른 답이 나왔습니다. 원문의 父母唯其疾之憂에 대해선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부모를 섬기는 효에 대해 물은 것이니 논리적으론 “부모가 편찮으실까 그것만 걱정한다”로 풀어야 할 듯합니다. 하지만 자식이 어찌 부모가 편찮은 것만을 걱정할 수 있겠습니까. 앞서 살펴봤듯이 물질적 봉양뿐 아니라 심기가 불편하지 않게 늘 온화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또 다른 해석은 “부모가 자식의 아픈 것만 걱정하도록 해드려야 한다”입니다. 부모의 걱정이 워낙 많으니 불가항력적으로 몸이 아픈 것 외에는 다른 걱정거리를 안겨줘선 안 된다는 해석입니다. 하지만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을 함부로 놀리다 아픈 것 또한 불효의 하나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세 번째 해석은 발상의 전환입니다. “부모는 오로지 자식이 병들지 않을까 그것만 걱정한다”입니다. 효에 대한 질문에 대해 오히려 자식을 아끼는 부모의 지극한 마음을 빌려 답함으로써 그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함부로 아파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맹무백은 시호에 무(武)가 들어갈 정도로 호전적 성격을 지녔기에 자칫 자신을 상하게 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비인 맹의자의 마음속 걱정을 대변해 줌으로써 부모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자중자애하라는 일깨움을 준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공자의 발언이 효 자체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당대의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과 질문하는 사람의 구체적 상황에 맞춘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논어’를 절대불변의 경전으로 받드느라 그 질문의 추상성에 매이게 되면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당시의 상황 또는 질문자와 공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출 때 이해 가능한 내용입니다. ‘논어’를 이해하기 위해선 질문 자체에 함몰되지 말고 공자는 왜 그렇게 답했을까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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