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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이 Dec 03. 2015

오늘의 나는 과거의 나를 치유한다.


한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는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마치 물병에 물을 담기 위해 그 주둥이에 깔때기를 대고 붓는 것처럼, 어린 시절의 조각들이 깔때기에 모두 쓸어 담겨 그 물병에 가득 쌓이고 농축된 것이 바로 지금의 나인 것이다.


고등학생 때, 유독 남자아이들의 장난엔 소스라치게 놀라며 치를 떠는 친구가 있었다. 처음엔 친구들을 너무 민망하게 만드는 그녀가 유별나게만 보였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 한 남학생의 어떤 짓궂은 장난이 아직까지도 그녀의 트라우마가 되었다는 고백을 들었다. 비로소 그녀를 이해하게 되면서 그런 그녀를 안타까워하게 되었고, 동시에 무작정 이상하다는 편견을 가졌던 내가 부끄러워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미안했다. 그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깔때기 이론을 무조건적으로 신봉하기 시작한 것이. 다시 말해, 나를 포함해 사람들은 모두 어린 시절의 과거로부터 기인하고 고로 이해 안 될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슬픈 것은 보통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이 더 오래 기억되고 곧장 상처로 남기 마련이란 점이다. 오늘의 그녀는 치유되지 못한 과거의 그녀로부터 맞물렸다. 상처난 과거는 어떻게 보다듬어 질 수 있을까.



중학교 때부터 적성검사란 것을 매년 실시했다. 매 검사 때마다 나는 안정감이 낮고 불안증세가 높은 학생으로 판명이 났고, 선생님은 이 결과지를 바탕으로 내 부모님께 아이가 안정감을 지닐 수 있도록 주의해줄 것을 안내하곤 했었다. 그것이 상처였다. 어린 나로써는 높은 불안감을 호전시키는데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당연스럽게 그것이 문제로 인식되고 낙인 찍히는 것 같아 꽤 충격이었다. 더불어 이로 인해 혹여나 부모님께서 나를 양육하는 데 있어 자책하는 부분이 생길까 심려를 끼쳐드린 죄송한 마음이 들었던 터라 계속해서 나의 그 부분을 원망하고 싫어하게 되었다.


대학생이 되었고, 여전히 나의 결여된 부분인 불안감이 높은 성격을 감추고 조심스러워했다. 특히 가족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그러다 조직행동론이란 수업에서 각개의 성향을 지닌 조직원들의 특성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원체 불안감이 높은 성격을 소유한 조직원이 있기 마련인데, 그 단어가 내비치는 부정적인 어감 때문에 무작정 그들이 부정적인 면모만 가질 것이란 편견을 가져선 안된다는 것이다. 불안은 환경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해주며, 그 변화에 따라 즉각적인 반응과 생각지 못한 창의적인 해결법이 샘솟는 큰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 깨달음에 순간 홀로 감탄사를 내벧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의 불안하고 예민한 성격은 극복 대상이 아니었고, 그 누구 특히 부모님의 잘못도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장의 현실도 불안하고 바뀐 환경도 불안했던 나는 그 초조감에 휩싸여 자주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할 수 있었던 것도, 다가오는 변화 앞에 더 많은 준비를 하고 극복에 노력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런 성격 덕이었다. 그렇게 믿기 시작하자 신기하게도 나는 변화를 무서워하지 않고 낯섬이 주는 새로운 자극을 좋아하게 됬다. 또한 나의 높은 불안감은 진취적인 성향의 바탕이 된다는 자부심이 되었다. 눈물 많던 열 몇살의 나보다 조금은 어른이 된 스무 몇살의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고 끌어 안아 보다듬고 있었고, 그리 늦지 않게 지금의 나는 그 때의 나를 치유했다.



최근에 친구가 나의 글을 읽고 어떻게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을 다 내벧을 수 있는지 부럽다며 칭찬 섞인 신기함을 내비춘 일이 있었다. 그러자 고등학교 때 좌우명을 적어내는 소개란에 '할 말은 다 하고 살자.'라고 써서 냈다가 이윽고 담임선생님이 면담시간에 한 시간이 넘도록 나를 나무랐던 기억이 났다. 같은 특성을 아이러니하게도. 말씀은 자기 의사를 다 표현하고 살 순 없다는 내용이었고, 사회생활 측면에서 충분히 일리 있는 말씀이셨다. 하지만 너무 오래 설교를 들어서 그런지, 나는 내 머리 속에 든 생각을 다 끄집어 내는 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라 믿게 되었다. 이후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생겨도 참으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왜 나는 말을 다 해야만 직성이 풀릴까' 혹은 '윗사람한테 하고 싶은 말을 내벧아서는 꼭 사회생활을 어렵게 만드는 걸까'라며 피곤한 나의 성격을 나무라기만 했다.


하지만 다 못한 말의 답답함은 지속 되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일기를 쓰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사를 말하되 오해 없이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시간을 두고 고민을 하고 단어 선택에도 신중을 가하기 시작했다. 성격이 급한 상대방으로부터 핀잔을 듣더라도 말이다. 결국 예전의 나보다 나아진 표현으로 조심스럽게 다시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말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덕분에 머릿속에 드는 생각을 언어를 통해 표출하고자 고민하니 좋은 글감을 마련하는데 큰 일조를 했다고도 여긴다. 나의 그런 성격이 드세보인다고만 여겼는데, 이제 더이상 그렇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좋아하고 있다. 지금도 나는 그 과거의 나를 계속 치유하고 있는 중이다.



조금일지라도 좀 더 성장한 어른이 된 오늘의 내가 열심히 그리고 씩씩하게 살아감으로써 자연스럽게 과거를 치유하고 있었다. 과거의 상처가 영원하리란 법은 없었다. 결국 오늘의 내가 과거의 생채기를 치유하고 그로부터 다시 현재의 내가 기인될 수 있었다. 기특하게도 말이다.


연락이 닿지 않는 그 친구도 지금은 과거를 극복하고, 치유된 과거로 새롭게 기인된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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