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빠진 게 없나요?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간편식 만들어 먹기에도 관심이 간다. 요리를 못하는 나 같은 사람도 손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그런 음식 말이다. 이를테면 충무김밥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인데, 윤기가 흐르는 갓 지은 쌀밥을 참기름 칠한 김에 둘둘 말아 굵직하게 썬다. 그리고 먹음직스럽게 붉은 양념과 보기 좋게 버무려서 오징어무침을 같이 내놓으면 끝!
언제부턴가 나는 ‘한국인의 밥상’이 아니면 안 되는 사람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야근으로 피로와 위장염은 달고 살았고, 아침에 일어나기도 힘들었다. 자고로 아침은 황제처럼 점심은 평민처럼 저녁은 거지처럼 먹어야 하는 법인데, 그것도 몸의 기본기가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 보니 나는 흰 죽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묽게 타서 먹는 것으로 아침 한 끼를 대신했다. 계속 먹다 보니, 쌀에 대한 일가견도 나름 생겼고 소신도 있게 됐다.
일찍 결혼한 고등학교 친구는 벌써 아들이 초등학생인데, 예전보다 더 짠순이가 되었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아끼지 않는 것이 ‘생협’에서 나오는 식품을 사 먹는 건데, 오이 1개에 3천 원이라고 해도 ‘생협’ 물건이면 냉큼 샀다. 언제는 한번 물어봤더니, 음식으로 온 가족 비염을 고쳤다며, 그때 음식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했다. 덕분에 건강도 찾고, 굳은 병원비와 약값을 ‘바른 먹거리’를 사는데, 투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 역시 불규칙한 식습관을 갖게 되면서 예전보다 더 예민한 몸이 되었는데, 어릴 때처럼 한 귀로 듣고 흘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산에서 나온 쌀도 알게 되었고, 주변에도 추천해줄 수 있게 되었다. 뭐든 관심을 가지는 만큼 알게 되고, 터득하게 되는 법이질 않나. 불필요한 살이 빠지고, 건강을 조금씩 되찾게 되니 내게 비결을 묻는 사람도 상당수 많아졌다. 그래서 최근엔 ‘나만의 식습관 노하우’를 정리해서 소셜미디어에 공유하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은 편이다. 그 어느 때보다 건강에 대한 관심사가 높기 때문일 것이다.
혼자만 알고 있기엔 아쉽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는데, 스스로 식단을 돌아보고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된 것 같아서 만족하고 있다. 무엇보다 ‘나만의 건강식’을 차려 먹으면서 제일 만족스러운 건 몸이 가벼워졌다는 사실이다. 예전과는 달리 아침에 가뿐하게 일어날 수 있고, 기분도 상쾌해졌다. 잠도 깊이 잘 수 있게 되었고,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 가벼움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
오랜 시간 내 마음을 괴롭혀왔던 것이 사라진 것이다. 하늘을 날 것처럼 뛸 듯이 기뻤다. 항상 남의 시선에 따라 사느라,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 수 없던 삶이었다. 그래서 누군가의 엑스트라처럼 내 삶에서조차 제3자로 끌려다니면서 살았다.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것, 나를 위한 것, 나 자신을 향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가 하는 것, 누군가가 좋다고 한 것, 누군가에게 잘 어울렸던 것이 있을 뿐이었다. 멋들어지고 예쁜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고, 불편했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내 체질에 맞는 음식도 아니었다. 보기 좋아 보인다고 해서 나에게 어울리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저 SNS에서 관심을 끌기 위한 사진 한 장을 찍으려고, 며칠을 아파하고 속 쓰려 하는 삶의 반복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밖에 되지 않았다. 더 나아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누굴 위해 사는가’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에까지 이르렀다.
나는 어떤 존재로 지어졌길래 이런 음식이 나에게 맞지 않는 것인지에 대해서 알아보고 공부하게 되었다. 언제까지나 쓰레기통처럼 내 몸을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약(死藥)이라는 것이 본디 좋은 약재를 모조리 다 가져다 쓴 약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충격이었다. 아무리 좋은 것이어도 독(毒)이 된다는 건데, 그렇다면 나한테 맞지 않는 음식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나 자신을 몰라서 학대하고, 다치게 하고, 아프게 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을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나를 사랑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낮은 자존감은 나를 해치고, 지치게 만들고, 괴롭게 했다. 경쟁 구도로 몰고 가서 나 자신의 마음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늘 긴장 상태였고,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벼랑 끝까지라도 몰고 가야만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모질고 아프게 나 자신을 닦달했다. 음식을 잘못 먹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음에도 나는 열꽃을 피우고, 끙끙 앓기만 했다. 이건 주변 사람들에게도 미안한 일이었다. 다만 별종이고 유난스럽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 참았던 것뿐인데, 그것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제는 내가 달라져야 했다. 우선은 예민한 체질의 나를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했다. 사실은 그게 제일 힘들었다. ‘왜 나는 이럴까?’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데, 난 대체 왜…’ 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어려웠다. 그러나 중요한 건 여전히 나 자신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나로 살기 위해서는 나다움을 받아들여야 했다.
팀장에게 눈엣가시가 되는 것은 그다음 일이었다. 처음이 힘들었을 뿐, 하나씩 거절하는 법을 배우자, 생각보다는 괜찮아졌다. 오히려 직원을 하대하고 군림하던 팀장이 상대적으로 배려해주는 태세를 취하게도 됐다. 그는 회사에서 먹는 점심, 간식, 회식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메뉴에 대한) 뜻을 쉽게 꺾지는 않았지만, 상대에게 나의 기호를 알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만으로 존중받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액션은 비록 ‘내가 예민한 체질이더라도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거절을 받아도 괜찮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건강한 마음이 되었다. 나를 알리고, 나답게 살기 시작하면서, 나의 아침은 이전보다 맑아졌고 경쾌해졌다. 매일 아침 마시는 흰 죽의 맛도 고소하고 달콤하게까지 느껴졌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했던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싸움은 역시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누군가가 나의 어떠함을 걸고넘어지며, 인신공격적인 발언을 한다 해도 당당하게 맞받아치고, 여유롭게 흘려듣는 담대함도 생겼다. 이 모든 것은 나다워질 용기를 넣은 식탁에서 기인한 것이다. 오늘 저녁은 반 공기를 덜어내고, 추어탕을 먹었다. 반찬은 김치 하나면 족했다. 식탁에 기름진 음식이 사라진 지 오래지만, 계속해서 담백하고 정갈한 음식만 먹으니 성격도 예전보다 차분해졌다. 입맛도 들이기 나름인 건지 때때로 고기 한 점 없는 채식이어도 맛이 좋다. 그리고 그 맛을 받아들인 나 자신이 좋다. 까탈스러운 나 자신의 나다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준 가족에게도 고맙다. 내일은 나답게 살기 위해 무엇을 먹을까 생각한다. 행복한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