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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나비 일기Psycho Diary 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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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변지영 Oct 22. 2020

너를 넘는 순간

다시 내가 보였다.

오래 달리기도 100M 달리기도 젬병인 내가 뛰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아마도 재택근무로 장시간 내 방에 앉아 있게 되면서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당연하다고 느꼈던 것을 잃고 난 뒤에야 깨닫게 되는 건 인지상정일까. 애초부터 당연한 건 없고, 거저 주어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대부분 착각한다. 당연한 것은 영원히 존재하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착각과 오만은 결국 상대방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돌아서게 만든다. 안타깝게도 당연한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소중하게 여길 줄 모른다. 당연하니까 소홀히 대하고, 대충 표현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책에서도 그러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너무 쉽게 생각하고 너무 쉽게 행동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당당해?”

나는 물었다. 아니,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끊임없이 자신의 말만 했다. 그의 목표는 자신에게만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외계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네가 외계인이니까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건 당연하다고 위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관절 같은 나라말 쓰는데도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죽을 노릇이었다. 그렇게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철저히 분리된 외계에 있었다.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이 한 공간에 있으면서 매일 피 튀는 삶을 산다는 게 얼마나 전쟁인지 우리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도움받고만 싶었을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상대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다. 그것이 화근이 될 거라는 것조차 몰랐다. 보고 배운 것이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가 겪은 세상엔 그 이상을 뛰어넘는 무엇이 없었기 때문이다. 돌봄을 받고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게 전부였다. 무지가 죄가 될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세상은 변했고, 사람들의 생각은 달라졌다. 무조건 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고, 나름의 의견을 내고 자신을 지키는 법도 터득하게 되었다. 그를 제외한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선택해야 했다. 답은 너무나 명확한데, 방법이 없다는 게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는 수학 문제를 풀면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했다. 정답이 나오면 통쾌하다는 것이다. 모든 인생의 문제도 수학처럼 답이 정확하게 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모두가 힘들 때마다 수학 문제 풀이에 기를 쓰고 덤벼들 것이다. 온몸으로 수학을 싫어하는 나 같은 사람조차도 말이다. 과연 인생에 정답지가 있다면 오늘의 한숨도 덜어질 수 있을까 생각했다. 나아갈 글의 방향을 모르는 커서가 눈앞에서 깜박거리고 있었다.

‘내가 넘어서야 할 것은 어제의 나 자신이다.’

심경이 복잡해서 머리나 자를 겸 미용실에 갔다.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아무렇게나 펼친 잡지에서 발견한 썩 괜찮은 문장이었다.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지만, 너무 멋진 말이었다. 자신을 느슨하게 하면 할수록 자신과 더욱 멀어질 것이다. 반면 나 자신을 엄격하게 대하면 오히려 가까워질 것이다. 그만큼 나 자신을 뛰어넘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 자신을 스스로 다스릴 수 없다면 그 어떤 일도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가뿐해진 머리가 한결 마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오랜만에 햇살을 받고 싶었다. 눈길은 자연스레 동네 공원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출근 시간이 지난 오전이었지만, 사람들이 삼삼오오 뛰고 있었다. 나는 아직 뛸 수 없는 상태여서 종종걸음으로 그들의 오래 달리기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내 눈앞에서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 했다. 가끔 숨을 고르며, 나를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동네 공원이 어떤 사람에게는 땀 흘리며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천천히 산책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같은 상황에 놓여있어도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경로는 달라진다. 순간, 나도 뛰고 싶다고 생각했다. 달리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왠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더욱 간절해졌다. 그래서 뛸 수만 있다면 뛰기로 마음먹었다.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은 가뿐하게 내려놓는 것도 방법이다.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비로소 가벼워졌다. 문제를 푸는 실마리는 나 자신을 가장 잘 아는 데 있었다.

생각을 정리할 때, 이만한 운동이 없다고 ‘달리기’를 추천받은 적이 있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도 팔을 꺼내놓고 땀 흘리며 뛰어가는 저 사람들은 무슨 생각 중일까 궁금해졌다. 때론 머리를 비우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저들도 나름의 정리가 필요할 것이고, 머리를 비울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뛰는 것이리라.

문제는 풀지 않으면 그대로 멈춰 있다. 그야말로 문제인 것이다. 문제는 풀었을 때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 문제는 풀릴 수도 있고, 풀리지 않을 수도 있다. 인생의 문제가 수학 문제보다 어려운 건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원히 풀리지 않는 문제로 남게 될 수도 있다. 풀어봐야 아는 것이다. 초콜릿 상자도 열어봐야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오랜 무기력증에 빠져있던 내가 멈춰 있던 시간 동안 나의 바람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풀지 못했던 문제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문제를 푸는 건 나에게 주어진 숙제였다. 내가 해야만 하고, 나만이 풀 수 있도록 애초부터 만들어진 문제였다. 풀었다고 해서 풀지 못했다고 해서 나쁠 건 없다. 어느 쪽이든 감당해야 하는 것도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다만 회피하는 건 문제를 푸는 태도가 아니라고 한다. 문제 자체를 직면하지 않고, 숨어버리는 태도는 나 자신에게 그 어느 것도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한 일에는 결코 후회가 없다. 그것은 문제를 직면하고 돌파했을 때, 나중에 취할 수 있는 태도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충분히 생각하기로 했다.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뛰다가 더는 뛸 수 없을 때 멈춰서는 러너처럼 나는 나 자신의 속도에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정확한 방향이 있어야만 정확한 속도를 낼 수 있다. 지금은 그것이 제일 중요했다. 결국 너를 넘어선다는 건 나를 넘어서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충분히 생각하기로 했다.

‘나에게 확신이 있어야 해’

그때, 그 시간에, 그날에 나 자신이 선택할 결정을 응원하고 싶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보다 한 뼘 자랐는지 멈췄는지는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에 있다. 하나가 풀리면 또 하나 풀어야 할 것이 생긴다. 그게 인생이란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인생 자체를 문제라고 명명하고 싶지는 않지만, 문제가 끊임없이 주어지는 게 인생이면 이제는 마음의 근력을 터득할 때이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생각해야 한다. 나 자신에게서 답이 올 때까지 말이다. 오늘의 한숨은 그걸로 되었다. 너를 넘는 순간은 곧 나 자신을 바라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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