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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지영 Sep 15. 2020

별의별 게 다 고맙습니다

어떤 말로도 할 수 없겠지만,

전쟁이 난 것도 홍수가 난 것도 아닌데, 평범한 일상이 사라졌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일자리가 없어지고, 가게가 줄줄이 문을 닫고 있다. 이젠 카페에서 음식을 먹거나 음료를 마시기도 눈치가 보인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화되었다고는 하나, 마스크를 벗느니 먹지 않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든다. 습관처럼 드나들던 카페 앞을 계속 서성이다가 못 들어간 게 몇 차례다. 그나마 위안 삼는 건 만날 약속과 모임 자체가 없으니 그 핑계 삼아 쓰지 않는 돈이 그대로 주머니에 남아있다는 것 정도일까.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울적하고, 흐리면 흐린 대로 울적한데, 이렇게 맑은 날은 대체 어쩌란 말이냐. 생각해보건대 헤어지기에 가장 좋은 날씨는 비가 오는 날이다. 울어도 티가 나질 않고, 굳이 귀 기울여 듣지 않는 이상 빗소리에 가려 말도 잘 들리지 않는다. 궁상맞아 보이기는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남 이사 알 바 아니지 않나. 다만 오늘처럼 가을 하늘 공황하고, 높고 푸른 날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신변을 흔들 만큼의 큰 고통이 삶을 휘감아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살 수밖에 없겠지. 그게 인생이다.

  장례식장 육개장이 맛 좋게 느껴졌던 때부터였을까. 하루를 버티기 위해선 우선 먹어야 했다. 애초부터 죽기 위해서 사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사생결단하고 직원을 괴롭히는 사장도 그게 자신이 살려고 하는 행동이라고 한다면, 그에게 속 시원하게 돌을 던질 자가 몇이나 될까. 매국노일지라도 자식 중한 줄은 알지 않던가. (다만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수 있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살려고 하는 치열한 몸부림일 뿐이다. (물론 지구는 둥글고, 사람은 어지간히 많아서 무조건 그 삶을 본인의 마음으로 헤아릴 수는 없겠다.)


 

멍 때리는 시간에 나는 사극 드라마를 찾아서 본다. 5분에 한 번꼴로 사람이 죽어 나가고 80% 이상이 총 맞아 죽거나 고문을 당하거나 칼에 찔려 죽는다. 고급관료는 때때로 사약을 받기도 하는데, 얌전히 죽지는 못한다. 목이 잘려나가거나 그전에 피를 토하고 죽는다. 대사는 보통 ‘나 죽는다.’ ‘너는 살아남아, 반드시.’ ‘제발 살아줘.’ 혹은 ‘너 내가 죽일 거야.’ 같은 것들이다. 유혈이 낭자한 사극 드라마를 보며 생각한다. 산다는 게 과연 무엇일까. 저들이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불현듯 그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다 보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삶이 아무렇게나 보낸 하루가 사치스럽게 느껴져 부끄러울 때가 있다.


  그러면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여기는 총칼도 없고, 피 흘려 쓰러져 죽는 이도 없다. 화염병도 없고, 다이너마이트도 없다. 다만 차가 없는 거리는 한산하다. 가게는 문을 닫았고, 집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없다. 학교도 회사도 모두가 멈춰버린 상태다. 언제부턴가 재택근무를 하면서 외출할 일조차 없어졌다. 가까운 공원엔 운동기구마저 쓸 수 없도록 묶여 있고, 주기적으로 출입 자체가 통제될 때가 있다. 요즘 우리는 온라인으로 업무를 보고, 회의하고, 수업을 듣는다. 인터넷으로 필요한 모든 물건을 사고, 때때로 팔기도 한다. 바깥으로 나갈 일이 없다. 그런 생활이 익숙해지고 있다.

    

  약속을 잡으려다 포기했다. 카톡으로 그저 일상을 나눌 뿐이다. 집에만 머물다 보니, 그동안 밖에 다니면서 하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책을 모으는 게 취미라 단 한 줄도 읽지 않은 책이 수두룩한데, 책이 쌓인 만큼 먼지도 가득했다. 매일 털어도 티가 나지 않는다. 구석구석을 뒤지다 보니 유행이 지나 쓸모가 없어진 물건이 하나둘씩 쏟아진다. 게 중에 쓸만한 건 팔았고, 어떤 건 무료 나눔을 했고, 나머지는 버렸다. 그러다가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글을 쓴다. 그리고 일을 한다. 그런 소소한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 SNS가 소식통이다 보니, 꾸준히 쓰고 있는데 자기 허세와 자기 자랑으로 가득했던 그 공간도 왠지 예전처럼 생기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잠깐 지나갈 줄 알았던 이 시간이 계속되고 있다. 안부로 시작된 연락은 분노했다가 우울해졌다가 신세 한탄으로 바뀐다. 같은 레퍼토리가 되풀이되니, 듣는 사람도 듣게 하는 사람도 힘들기는 마찬가지. 언제부턴가 활기 넘치던 카톡방도 찬물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를 모르는 시간이다. 그러다 보니 말을 아끼게 된다. 그렇게 점점 ‘관계 속 거리 두기’까지 진행되고 있다. 그럴수록 얼굴을 맞대고 사람을 만나던 때가 그립고, 함께 나누었던 차 한 잔이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어쩌면… 여러분은 마스크만 써도 되었던 2020년을 그리워할 날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코로나 19는 영원히 종식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도 들었고, 치료제 개발이 2-3년은 걸린다는 전망도 있었다. 그것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보다 더한 팬데믹이 온다는 건데, 마음을 단단히 하라는 말보다도 무거웠다. 아니, 무서웠다. 화창하고 좋은 봄날의 이별 통보만큼 느닷없고, 뜬금없고, 잔인한 말이었다. 그런데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오히려 담담했다. 아무렇지도 않냐는 말에 나는 그냥 ‘응’이라고 답했다. 마스크보다 더한 걸 쓰게 된다면 방독면인가. 갑자기 생각하니까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도통 어떻게 흘러가는 날들인지 잘 모르겠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려고 집 앞 공원으로 나갔다. 세 살쯤 되어 보이는 아가가 마스크를 쓰고 아장아장 걷고 있었다. 겉보기에도 족히 여든은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뒤따라 나서는데, 아가가 한마디를 했다.   

  

  “할부지. 마스크 꼬꼬기뚜세오”

  “어? 꼬꼬기”

  “아니 아니 아니야 너갖더사딧#&325”    

 

  보다 못한 아가가 턱스크 할아버지의 마스크를 손으로 잡고 올리는 시늉을 했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장면이었다. 어릴 적 상상했던 2020년은 우주 도시이거나 해저 도시였는데, 알고 보니 마스크 도시였다. 그것도 온 지구가 다 같이. 문득 지금보다 더한 시대가 온다면 조금 더 자란 저 아가가 할아버지를 지켜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어떤 사극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이 있었다. 눈앞에서 부모가 죽어 나가고, 왜놈들이 사람을 잡아가는데 같이 맞서지 않고, 그는 몰래 사진을 찍고 글을 썼다. 이걸 보고 왜 맞서지 않고 글을 쓰냐는 질문에 그가 답했다. 글은 힘이 있고, 이것 또한 기록이 될 테고, 써먹을 데가 있을 거라고 말이다.


  모든 일이 정지된 삶인 것 같지만,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다. 살아서 숨 쉬고, 소통하고, 생각하고 있다. 때때로 먹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먹는 고민에 하루를 다 써도 아무렴 어떠랴. 살기 위해서 먹는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먹기 위해 사는 일도 나쁘지 않다. 산다는 건 단순하고도 꾸준하고 반복적인 일이다. 그러나 영원하지 않고, 거저 주어진 것도 아니다. 언젠간 끝이 나고 마지막은 분명히 있다. 덤으로 받은 오늘, 하늘을 보며 어깨를 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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