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하게 외친 한마디 I’m ready! 그렇게 시작된 스타벅스 라이프.
우선 책상 앞에 앉았다. 내가 영어 인터뷰를 봐야 한다니. 분명 전화를 받았을 땐 기뻤는데 그 세배 이상의 두려움이 밀려온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우선 내가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영어를 못해도 돈을 쓰는 입장, 그러니까 소비자 역할의 영어는 어떻게든 된다. 단답형으로 말하거나 손짓 발짓을 해도 되고, 사진을 보여주던지 아니면 조금 미안하지만 아무 말 없이 카드만 내밀어도 절반 이상은 해결된다. 그런데 이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내가 영어로 돈을 벌어야 한다니. 그리고 그 이전에 나를 채용할지 말지 결정권을 쥐고 있는 매니저와의 인터뷰에서 통과를 해야 한다니.
심호흡을 하고 방법을 찾아보자.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온 두 가지에 희망을 걸 수밖에. 한국에서 나고 자란 우리들이 가진 힘. 바로 ‘인터넷 검색’과 ‘주입식 교육’. 우선 온갖 블로그와 사이트를 샅샅이 뒤졌다. 고맙게도 캐나다 스타벅스의 면접 과정에 대해서 세세하게 정리해 준 많은 블로거분들이 있었다. 그분들의 글을 한 자 한 자 곱씹어가며 외우고 또 외웠다.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을 수 있으니 과정들을 미리 익히고 최대한 당황하지 말자는 생각이었다.
다음으로 캐나다의 구인구직 사이트에 공개되어 있는 인터뷰 예상 질문과 답변들을 검색했다. 그리고 최대한 쉬운 표현들로 정리된 것들을 몇 가지 골라 서로 이리저리 이어 붙이고 편집한 후 통째로 외우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는 못 했지만 그냥 읽고 또 읽고 머릿속에 넣었다. 이제는 뇌세포가 점점 사라져 가는 나인지라 쉽진 않았다. 새벽 1시가 되고 2시가 넘어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이런 내가 스스로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 고생이 제발 빛을 바라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인터뷰는 화상으로 진행됐다. 언제나 그렇듯 친절한 스타벅스 직원분과 만나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후 본격적인 질문 시간이 시작됐다. “자기소개해 줄래?” 그래 역시 예상대로 흘러가는군. 미리 써놓은 스크립트를 카메라 바로 밑에 띄워놓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그 이후 몇 개 예상 질문에선 최대한 성실하게 답변을 했다. 하지만 하룻밤 연습했다고 내 발음이 자연스러워질 수가 없지. 결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들통이 났다. 한두 번 말문이 막히기 시작하더니 예상 질문에서 벗어나는 순간 침묵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단어와 단어를 이어 붙여가며 답변을 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이건 망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인터뷰 말미에 매니저가 솔직하게 말을 해줬다. 손님이 엄청 많은 매장이라 지금 상태론 힘들 거다. 자기도 캐나다로 이민 온 사람이라 내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영어 연습을 좀 더 해서 6개월이나 1년 후에 다시 지원하면 그때 함께 하자며. 나중에 결과를 알려준다고 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탈락 확정이다. 웃으면서 고맙다고 말했지만 마음이 쓰렸다. 역시 인생에서 요행을 바라는 건 한계가 있는 거야.
예상은 했지만 결과가 너무 처참해서 이건 실망을 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좌절을 했다기보단 약간 멍한 느낌이었다. 갑자기 며칠의 에너지를 당겨 쓴 덕분에 그렇게 붕 뜬 느낌으로 하릴없어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당분간은 영어 인터뷰는 무리라는 걸 스스로 다짐한 후 다른 길을 찾으며 도전의 시기를 다시 조율해 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더 지났을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여기 스타벅스 ㅇㅇ 매장인데 (지난번 인터뷰와는 다른 곳) 바리스타 포지션 관심 있으면 인터뷰 보러 올래?” 망설이다가 뭐라고 부연 설명하기가 더 어려울 것 같아 그냥 예쓰라고 대답했다. 난 아직 안 된다고 마음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렇게 일을 벌이다니. 당일까지 엄청 망설이다가 그냥 영어회화 연습하고 공짜 커피나 한잔 마시러 간다고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방향이라 괜히 발걸음에 긴장감이 더해졌다. 지난번은 화상이어서 스크립트라도 챙겨놨는데 오늘은 대면 인터뷰다. 온몸에 땀이 줄줄 흘렀다. 인사만 잘하자. 외워간 문장 쏟아내고 정 안되면 웃으면서 나오자. 그나마 다행인 게 한국의 험난한 사회생활의 경험치 덕분인지 얼굴에선 긴장한 티가 잘 안 난다는 것. 문을 박차고 들어가 주문받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인터뷰 약속 때문에 왔다는 문장을 백 번은 되뇌고 간 덕분에 여기까진 좋았다. 그리고 잠시 후 매니저와 만나 인사를 하고 인터뷰가 시작됐다.
도무지 편하지 않은 의자와 테이블, 매장의 음악소리 때문에 우리는 마주하지 않고 같은 방향으로 앉아 상대방에게 몸을 기울이고 얘기하는 상황이 됐다. 누가 보면 인터뷰가 아니라 친한 친구끼리 얘기하는 것 같은 그런 모양새였다. 매니저는 자기소개 같은 건 물어보지도 않았다. 좋아하는 커피나 일상적인 이야기들, 캐나다에 온 이유를 묻고 여기 생활은 어떤지에 대한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러다 딱 한 가지 궁금해한 것은 한국에서 스타벅스에서 일해본 경험이었다. 한국의 스타벅스에서 두 달 정도 일했던 걸 경력란에 넣어놨는데 그걸 주의 깊게 봤나 보다. 솔직하게 아주 짧게 일했고 모든 포지션을 다 경험해 보지 못해서 아쉬웠고 그래서 꼭 여기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과 캐나다의 차이가 있는지 물음에 메뉴는 거의 비슷하고 시즌 음료는 좀 다르다고 얘기해 주니 엄청 신기해하고 재미있어했다. 그렇게 인터뷰가 마무리될 때쯤 나는 조용히 입고 있던 점퍼를 벗었다. 그 안에 한국에서부터 소중하게 고이 접어온 스타벅스 앞치마를 보여주며 I’m ready!라고 외쳤다.
서양 친구들이 아주 작은 것에도 감동하고 표현이 풍부한 걸 알았지만 매니저가 정말 진심을 다 해 좋아했다. 성공했을까라고 생각이 드는 순간 그는 분명히 웃고 있었지만 앞으로 다섯 명 더 면접을 본 다음에 결과를 전화로 알려 준다고 했다. 머쓱하게 점퍼 지퍼를 올리고 돌아서 나왔다. 지난번엔 하루 이틀 에너지를 당겨 썼다면 오늘은 일주일 치 이상은 다 가져다 쓴 것 같았다. 멍하게 집에 돌아와 또 며칠이 지났다. 나의 퍼포먼스는 잊혀진 걸까. 영어 못하는 건 전혀 상관없다고 스타벅스는 누구한테나 열려 있다면서 이 거짓말쟁이 같으니라고.
그렇게 두 번째 상처를 입을 찰나. 전화가 울렸다. "안녕 케빈, 축하해! 이메일로 오리엔테이션이랑 트레이닝 일정 보내줄게. 다음 주에 만나자!" 땡큐만 무한 반복하며 전화를 끊었다. 와 이게 진짜야? 화상 인터뷰는 광탈하고 대면 면접에선 나보다 매니저가 말을 더 많이 했는데. 그래 설거지라도 하고 청소라도 하면서 어떻게든 버티다 보면 언젠가 커피 만드는 것도 알려주겠지. 이왕 여기까지 온 것 쫄지 말고 해 보자. 나 이제 스타벅스 파트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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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vin_dayby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