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적응에 도움을 준 친구들, 내가 스벅에서 계속 일하수 있던 이유
오리엔테이션은 토요일 오후. 걱정반 기대반으로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매장의 가장 큰 테이블엔 누가 봐도 오늘 만난 것 같은 다섯 명의 친구들이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딱 봐도 여기가 오늘 교육받을 사람들이구나. 쭈뼛거리며 조용히 앉아 있으니 잠시 후 매니저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래도 한번 본 얼굴이라 내적 친밀감이 들었다. 저 친구가 나를 뽑아줬구나. 이제 충성을 다해야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최대한 알아듣는 척 온갖 정신을 기울였다. 짤막한 자기소개를 돌아가면서 하고 매니저가 간단한 질문들, 예를 들어 스타벅스에서 좋아하는 메뉴나 커피 시음을 함께 하고 맛에 관련 것들을 물어보면 자유롭게 프리토킹하는 그런 방식이었다.
여기 친구들은 참 적극적이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편하게 이야기하고 처음 봤는데도 정말 친해 보였다. 나는 이렇게 아웃사이더로 밀려나는 건가. 설마 뽑는다고 해놓고 자르진 않겠지. 이 짧은 시간에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집중력이 떨어질 찰나 매니저 친구가 자연스럽게 나를 이끌어줬다.
“케빈은 작년에 캐나다에서 한국에 왔고 서울의 스타벅스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어” 아 예스, 그럼요. 긴장한 티 내지 말자. 더듬더듬 나는 최대한 사람 좋은 미소를 날렸다. 한국의 위상이 높아진 덕분인지 모두 코리아를 알고 있었고 나를 굉장히 좋은 사람인 것처럼 바라봤다. 그래요 나쁜 사람 아니야, 단지 나이 많고 영어를 좀 못할 뿐이지.
참고로 한국과 캐나다의 스타벅스 오리엔테이션 시스템을 비교해 보면 한국은 여러 매장의 신입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출근 전에 집체교육을 진행한다.(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고 당시 나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 하지만 여긴 따로 그런 과정은 없는 듯하다. 어색하게 도레미파 '솔’ 톤으로 크게 말하며 정해진 인사 멘트 익히기 과정도 없었다. 교육 주제는 비슷했는데 다만 주입식 교육이 아닌 토론식으로 한다고 할까. 스타벅스 정신이나 업무에 임하는 태도, 고객의 불만에 대응하는 방식들에 대한 것들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 나누는 형식이었다. 숨 가쁜 몇 시간이었지만 그리 나쁘지 않게 마무리하고 다음 스케줄을 개인별로 전달받을 거란 안내를 받은 후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메일 한통이 도착했다. 내 이름 옆에 트레이너의 이름이 함께 있었다. 트레이너는 '멘토' 개념으로 초반에 나와 근무가 거의 동일하게 구성돼서 모든 포지션에서 알아야 할 것들을 전담해서 알려주는 친구였다. 첫 출근 날, 어색하지만 최대한 반갑게 인사하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예쓰를 계속 외쳤지만 아무래도 다 알아듣질 못했다. 트레이너 친구는 아주 참을성이 많고 여유가 있어서 두 번 세 번이고 언제든지 내가 이해할 만큼 쉬운 표현으로 말해줬다. 그런데 이게 몇 번 쌓이니 그녀도 답답했는지 갑자기 나에게 한국말을 하기 시작하는 거 아닌가. 어색한 외국인 화법이 아니라 이건 뭐 그냥 한국사람인데? 갑자기 내가 눈이 똥그래지니까 자긴 한국 좋아한다고 첫 남자 친구가 한국인이었다고 나중에 한국 가서 살고 싶다는 TMI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아니 네가 왜 까치산역을 알고 있냐고. 거기가 무슨 관광지도 아닌데. 그렇게 화기애애한 트레이닝 데이를 거친 덕분에 우려와는 달리 초반 적응이 굉장히 수월했다.
하지만 며칠 트레이닝을 받았다고 모든 게 몸에 익진 않았다. 아무리 집에 가서 따로 레시피 공부를 해도 막상 주문이 들어오면 까맣게 생각이 안 날 때도 있었다. 돌체라떼를 주문했는데 에스프레소 샷을 빼고 내준 적도 있었다. 그 손님의 당황하는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커피를 시켰는데 따듯하고 달달한 우유를 주다니. 그래서 나는 헷갈릴 땐 무조건 아무나 붙잡고 물어봤다. 손님들이 질문하면 모르는 것 투성이라 하루에도 몇 번씩 매니저와 슈퍼바이저를 호출했다. 상대의 말을 못 알아 들어서 창피하긴 했지만 그건 내 사정이고. 그리고 같이 근무하는 파트너들에게도 계속 물어봤다. 이 커피는 블론드가 맞니? 이 우유는 저지방이 맞을까? 이 음료에는 시럽이 몇 번 들어가지? 정말 귀찮을 정도로 물어봤다. 그 덕분에 빨리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이제 신입이 오면 레시피 모를 땐 케빈한테 물어보라고 농담을 들을 정도니까.
그러던 어느 날은 슈퍼바이저 친구 한 명이 여러 파트너 앞에서 나를 칭찬하는 것 아닌가.
"케빈은 매일 나에게 와서 여러 가질 물어봐. 보통 사람들은 그렇지 않거든. 귀찮거나 자기가 모른다는 게 창피하니까. 근데 케빈은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이야. 다들 걱정하지 마 모르거나 궁금한 건 언제든지 물어봐. 그게 나나 매니저가 있는 이유잖아."
엥? 뭐야 갑자기. 이거 먹이는 건가? 하지만 그 친구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나는 그저 실수하고 욕먹기 싫어서,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남으려는 애절한 발버둥이었을 뿐인데. 영어도 못하는데 일도 못하는 무능한 직원으로 평가받을까 봐 얼마나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내가 이런 평가를 받다니. 이거 진짠가?
그래도 시작이 좋다. 면접 준비부터 인터뷰 탈락, 긴장의 연속인 오리엔테이션과 신입 트레이닝이 끝나고 이제 나도 스타벅스 바리스타로 주문을 받고 음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바라던 걸 이루어 나가는 나 자신이 기특하면서도 매일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오늘은 또 무슨 말을 못 알아먹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될까. 또 어떤 음료를 엉망으로 만들어서 손님이 컴플레인할까. 그럼에도 씩씩하게 일하러 나갈 이유가 한 가지 더 생겼다. 나의 동료들, 이 친구들이 나를 너무 좋아한다. 도대체 왜 그러지.
크리스는 나를 위해 듀오링고에서 한국말을 공부하고 맨날 안녕이라고 인사해 준다. 질은 나보다 한국말을 더 잘해서 뭐든 물어볼 수 있다. 로라는 나에게 동네 순두부찌개 맛집을 추천해 주고, 토니는 해물파전 맛집을 알려준다. 미카는 나랑 BTS 노래 맞춰서 같이 춤추고, 케이티는 나의 영어 문법 교정을 도와준다. 테일러는 매일 먼저 나에게 장난을 건네고 써니는 손님이 무례하게 하면 나 대신 욕해준다. 조엘은 레알마드리드 게임 정보를 매주 알려주고 세포라는 드라이브스루가 춥다며 직원용 점퍼를 꼭 챙겨준다. 사브는 내가 매장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락앤롤이라고 외쳐주고 크리티카는 다른 직업으로 커리어 발전을 생각하는 내게 자신을 친구를 소개해준다. 초창기 나와 함께 일했던 친구들과의 몇 가지 일화다. 대부분은 이제 우리 매장을 떠났지만 그래도 그 따뜻함과 추억은 마음속에 남아있다. 물론 그 이후에 만난 친구들도 너무나 좋은 동료들이라 정말 감사할 뿐이다.
지금 돌아보면 정말 운이 좋았다. 일이 힘들어봤자 얼마나 힘들겠나. 가장 어려운 건 사람인데 그 부분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었다. 내가 캐나다 스타벅스에서 가장 먼저 배운 건 친구들이 나에게 보여준 호의였다. 어쩌면 나는 오랜 사회생활을 하며 습득한 것들로 인해 나도 모르는 사이 이곳에서 살아남은 방법들을 자동반사적으로 실천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동료를 편하게 대하는 법은 솔직히 몰랐다. 상대방의 말을 그대로 믿어도 될까, 칭찬은 뭔가 다른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을까, 끼리끼리 험담이나 나누고 시기질투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내가 여기서 안주하면 저들은 더 빨리 치고 나가지 않을까, 결국엔 우리 중 하나만 살아남지 않을까. 내가 한국에서 가장 오래 몸담았던 조직은 철저한 성과주의 팀이었다. 우린 결국 다 개인이고 각자의 커리어 목표의 성취를 얻고자 움직였다. 그래서 많은 걸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몇 년 만에 연락해 인사 나눌 동료 하나 없는 게 매번 아쉽긴 하다. 어쩌면 남이 아닌 내가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나 스스로 누군가와의 벽을 계속 세우고 있었을 수도 있다. 동료애로 똘똘 뭉친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건 이 바쁜 와중에 사치라 여겼다. 그렇게 수년간 꼬일 대로 꼬였던 실타래가 나보다 한참 어린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며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풀려가고 있는 중이다. 오늘도 나를 기다리는 친구들과 손님들을 위해 신나게 커피 한잔 만들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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