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스러움을 빠져나와 집에 돌아오면 잠깐의 고요가 찾아온다.
냉장고가 숨 쉬는 소리,
차게 식은 방을 어떻게든 데워보겠다고 전기히터가 으르렁거리는 소리.
그렇게 기다리던 적막인데도 막상 마주하면 마음이 조금 무거워진다.
그런 날에는 감정이 과장된 예능도, 심장을 끝까지 쥐어짜는 드라마도 모두 너무 큰 소리로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단조로운 말투로 사실만 차분히 나열해 주는 채널을 찾는다.
이를테면,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지구 어딘가의 푸른 바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얼룩말 무리,
나무 위에서 위장한 채 느릿하게 움직이는 작은 생명들.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그래서 오히려 마음이 풀린다.
집중하지 않아도 괜찮고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화면.
백색소음처럼 틀어만 두어도 되는 방송을 나는 꽤 오래 좋아해 왔다.
어제는 어느 부족의 성인식 이야기였다.
아마존 깊은 숲 속 마을에는 ‘총알개미’라 불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프다는 독개미 수백 마리가 들어 있는 장갑에 손을 넣어야 어른이 되는 의식이 있다고 했다.
부족을 찾아온 한 외국인 남자가 그 의식을 체험하게 되었고
함께 참여하는 열두 살 소년에게 물었다.
“무섭지 않아?”
소년은 잠시 망설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서워요. 그래도 울면 안 돼요. 소리도 지르면 안 돼요. 부모님이 그렇게 말했어요.”
아마 나라면 손을 넣는 순간 모든 소리를 다 쏟아냈을 것이다.
발을 구르고, 울고, 멈추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은 죽음보다 고통이 더 무서운 나이라서.
남자는 그러다 이미 성인식을 치르고 온몸으로 고통을 버티고 있는 청년에게 다시 물었다.
“울면 안 되나요?”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울어도 돼요. 울면 조금 덜 아파져요. 안에 있는 걸 꺼내놓는 게 좋아요.”
견디는 동안에는 울면 안 되지만 지나고 나서는 울어도 된다는 말이,
울어야 덜 아프다는 말이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출근하고 괜찮은 척 하루를 통과한 뒤
모든 게 끝나고 나서야 갑자기 무너지는 날들이 있다.
나는 주로 집에서 그 장갑을 벗어던진다.
그런데 장갑을 벗어도 고통은 종종 하루를 더 따라온다.
어른이 된다는 건
감정을 잘 숨기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자기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버티는 시간 이후에는 울어도 된다는 걸, 울면 조금은 덜 아파진다는 걸
백색소음 같은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알려주었다.
그 부족의 족장은 이런 말도 했다.
“성인식을 할 때 이름을 부릅니다. 두려워서, 혹은 마음이 바뀌어 앞으로 나오지 않는 건 모두에게 치욕이 됩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말했다.
“참여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일 먼저 장갑에 손을 넣고 싶어요.”
가장 먼저 손을 넣은 사람에게 총알개미는 모든 독을 남김없이 쓰기 때문이다.
다음 순서는 훨씬 덜 아프다고 했다.
그의 용기가 부러웠다. 나는 아마 그 자리에 모인 모두에게 치욕을 안겨줬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겪는 이 고통을 통과의례라고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
참으라는 말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도 아니고.
그저 모든 사람은 하루의 어느 시간엔 각자의 방식으로 장갑에 손을 넣고 있다고 생각해 보면.
그리고 통과한 뒤에는 울어도 된다고.
지금이라면 괜찮다고, 이제는 울어도 된다고.
누군가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