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자몽 머핀

by 고양이


레몬은 가볍다. 설탕이 조금만 얹히면 금방 웃는다.

하지만 자몽은 아무리 손질해도 끝에 쓴맛이 남는다.
그걸 지우는 방법은 아직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그 맛을 좋아한다.
달았다가 갑자기 식는 느낌.

입안에 오래 남는 쌉싸름함.

굳이 의미를 붙이지 않아도 뭔가가 정리되는 기분이 든다.


자몽 한 상자를 사 왔다.
식초를 풀고, 베이킹소다도 뿌리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괜히 한 번 더. 그리고 또 한 번.

찬물에 담가 두었다가 꺼냈더니 껍질 위에 희끗한 자국이 생겼다.
마음이 쓰여 다시 뜨거운 물을 끼얹었다.

그러는 사이 자몽은 살짝 생기를 잃어버렸다.

막 사 왔을 때의 반짝임은 사라지고 색만 남았다.


껍질을 얇게 벗겼다.
붉은 부분만 남기려고 칼끝을 최대한 눕혔다.

흰 부분은 쓰다.
조금만 섞여도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레몬도 그렇고, 시트러스 세계는 원래 이런가 보다.

벗겨낸 제스트는 밀폐해 냉동실에 넣어두고 알맹이만 남긴다.


속껍질을 벗기는 일은 지루하다.

왜 굳이 또 벗겨야 하나.

그 부분도 쓰다.

이 지루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얇은 막을 떼어내자 붉은 과육이 드러난다.

반복하다 보니 눈을 쓸던 장면이 떠오른다.
내리는 동시에 쓸어야 했던 함박눈.
뒤돌면 금세 다시 덮여 있던 바닥.

그날은 계속 쓸어야만 했다.

아무도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 멈추어야 하는지도.


자몽청은 생각보다 손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꺼냈다.
알맹이를 건져 즙을 짜고 남은 건더기를 모았다.

즙은 주스로 마시려고 따로 보관하고,

건더기를 쓸 생각인데 아직 물기가 많다.
이대로 넣으면 머핀은 눅눅해질 게 분명했다.
팬 위에 올려 열을 가했다.
수분이 천천히 날아갔다.

기본 머핀 반죽에 자몽 건더기와 제스트를 섞었다.
옅은 반죽 속에 붉은 점들이 흩어졌다.
노을 조각처럼.


180도, 25분.

5분쯤 더 두고 싶은 마음이 스쳤지만 이번엔 멈췄다.

오븐을 열었을 때 따뜻한 공기가 얼굴을 덮쳤다.

이걸 난방기로 활용해 볼까 잠시 고민했다.


머핀을 반으로 갈랐다.
김이 아주 가늘게 올라왔다.

사이사이 자몽 알갱이가 박혀 있었다.
붉은색이 생각보다 또렷했다.


한 입 베어 물자 향이 먼저 번진다.
그리고 조금 늦게 쓴맛이 올라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겹쳤다.

완벽한 쓴맛이다.


창밖은 거의 어두워졌고 오븐의 열기만 살짝 남아 있었다.

유리창에 비친 자몽색이 천천히 사라졌다.

손끝에 묻은 향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달지 않은데도 충분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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