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깨를 물에 담가 손으로 살살 휘저어 씻는다. 고운 체로 참깨를 거르며, 참깨와 함께 섞여 있던 흙이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떠오르는 티끌도 걷어낸다. 걸러낸 참깨의 물을 뺀 다음, 큰 냄비에 넣고 중간 불에 올려놓는다. 나무주걱으로 축축한 참깨를 젓기 시작한다. 냄비가 달아오르고 참깨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수분이 날아간다.
참깨를 젓는 틈틈이 간단한 일들을 처리한다. 설거지를 하고, 식탁을 닦고, 휴대폰의 문자에 답장도 한다.
달궈진 냄비 속에서 '따닥' '따닥'작은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좀 더 자주 휘저어 참깨가 타지 않게 한다. 약하게 불조절도 한다.
깨 볶는 냄새가 집안에 퍼져가기 시작한다. 이제 '따닥' 소리는 더 크고 빈번하게 나며 냄비 안 여기저기서 참깨가 튀어 오른다. 씻을 때 납작했던 것이 토실하게 부풀어 오르고 색깔도 잘 익은 황갈색으로 바뀌어 간다. 참깨 한두 알을 손가락으로 눌러 비볐을 때 톡 터지며 가루로 부서지면 다 볶아진 것이다.
고소한 냄새는 어느새 집안에 가득 차 있다.
깨 볶는 냄새에 이런저런 기억과 상념들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옛날, 몇 미터 전부터 코를 벌름거리게 하던 시장 모퉁이 참기름 집의 고소한 냄새부터,
방금 만든 음식 위에 참깨를 뿌리며 '부잣집 뒷간을 푸면 참깨가 한 말이나 나온디야' 하시던 친정엄마의 말도 떠오른다. 옛날에도 부잣집은 비싼 참깨를 음식에 아끼지 않고 넣었다는 말씀이겠지.
서로 재미나게 지내는 모습을 볼 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쓰는 '깨 볶는다', '깨 볶는 냄새가 난다.' 라는 관용구도 자동반사로 튀어나오고,
'가을 전어 대가리엔 참깨가 서 말'이라느니, '참깨 들깨 노는데 아주까리라고 못 놀까'라는 속담까지 꼬리를 문다.
그리고 마침내는 대학 시절 읽었던 김준태 시인의 <참깨를 털면서>라는 시에까지 생각이 뻗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시판믹스로 핫케익과 도나스를 종종 만들어 주었다.
한파주의보로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 어느 주말에,
'그때 도나스 맛있었는데' 하는 둘째의 말에 순간 '필'을 받아 바로 핫케익가루, 도나스가루, 찹쌀도나스가루를 주문하였다.
찹쌀도나스가루는 애초 구입목록에 없던 것으로 단지 배송비를 맞추기 위해 샀지만, 지금은 핫케익가루나 도나스가루보다 더 애용하고 있다. 에어프라이어로 간편히 깨찰빵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찹쌀도나스도 매우 맛있긴 하지만 튀기고 난 기름을 처리하는 과정이 번다하다. 또 기름에 튀기는 찹쌀도나스보다 굽는 깨찰빵이 건강에 좀 더 이롭지 않을까 한다.
깨찰빵은 레시피대로 반죽하고 동그랗게 빚은 다음 온도와 시간을 설정한 에어프라이어에 구우면 그만이다.
이 찰빵에 넣으려고 참깨를 볶는 중이다.
이왕이면 참깨를 듬뿍 넣는 게 풍미가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김치냉장고 구석에 존재감 없이 놓여있던 참깨 봉지를 떠올리게 하였다.
참깨는 은퇴 후 농사일을 취미로 삼는 아버님이 손수 지어 보내주신 것이다.
직장생활에 분주하고 살림에 큰 취미가 없는 며느리는 참깨의 적당한 용처를 찾지 못하였다. 나물을 무치거나 음식의 고명으로 밖에 사용할 줄 몰랐기에, 반 이상 남은 참깨는 김치냉장고 깊은 안쪽으로 밀려난 채 잠자고 있었다.
잘 볶아진 참깨를 깨찰빵 반죽에 듬뿍 넣는다.
빵을 씹을 때마다 참깨 알갱이들이 '톡톡' 고소함을 터트리며 그 존재감을 확실히 할 것이다.
참깨를 볶으며 꼬리 물던 상념의 끝에 김준태 시인의 <참깨를 털면서>라는 시가 자동완성처럼 떠올랐다. 김준태 시인을 비롯한 여러 저항시인들의 시를 가슴 뜨겁게 읽던 시절이 있었다.
<참깨를 털면서>는 순한 맛을 가진 시인의 초기작이다.
참깨를 털면서
김준태
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 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世上事)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 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 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都市)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 본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 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 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 좋게 내려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참깨를 볶는 일’은, ‘참깨를 터는 일’과 비슷하다.
빨리 볶아내려고 센 불에 마구 휘저으면 깨는 냄비밖으로 흩어지고, 냄비 바닥의 참깨들은 까맣게 타며 독한 탄내를 풍긴다. 가운데의 참깨는 여전히 축축하고 납작하게 남은 채다.
빨리 털겠다고 힘을 다해 참깨다발을 내리치면 처음엔 참깨 알맹이가 시원하게 떨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곧 참깨모가지가 댕강 끊어져버릴 것이다.
참깨는 '세지도 너무 약하지도 않게', ' 슬슬, 천천히' 털고 볶아야 한다.
'참깨를 볶듯이' '참깨를 털듯이'
자꾸 앞서가는 마음과 조급히 결과를 바라는 마음을 잘 다스려 보고 싶다.
모든 것이 휘휘 돌아가고, 어제 일은 옛날 일로 빠르게 사라지는 세상 속에서 '세지도 너무 약하지도 않게', '슬슬, 천천히'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고소한 맛으로 깨볶는 냄새를 풍기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