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기왕성하던 고3때 같은 반 친구들과 어울려서 종종 술을 마셨다. 다들 덩치가 커서 교복만 벗으면 고삐리인지 대학생인지 모르고, 대패삼겹살집에서 고기와 소주를 실컷마셔도 3만 원이면 충분했던 시절이다. 그러다 돈이 없으면 종종 놀이터에서 새우깡에 소주를 마셨다. 근데 꼭 그러다보면 동네 다른 무리나 형들하고 서로 쳐다보다가 “갈구냐” “눈깔아” 하거나 “거 참 대개 시끄럽네”하면서 기싸움을 하고 싸움이 붙는다. 지나고 보니 그 나이대에만 있는 수컷의 본성 같은 거다. 그날도 동네 형들과 친구가 마찰이 있었다. 내 기억엔 음주상태에서 친구가 시비를 걸었고 그때 그 양반이 이렇게 얘기했다. “나 리모콘이야. 찔르라면 찔러” 복장은 기억이 안나지만 작은 칼을 갖고 있었고 후까시(폼) 잡는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사고가 나겠다 싶어서 나는 중간에서 말렸고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사회부 초년병 때 나는 그 말이 종종 생각났다. 캡의 지시는 추상과 같았고 내려오는 지시에 따라 나는 이행해야 할 때가 많았다. 부당한 지시가 아니었고 기자로서 응당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벅찼고 나는 기자 체질이 아닌가, 내 길이 아닌가 자문해야 했다. 마치 상부가 누르는 리모콘에 따라 칼로 찌르는 로봇 같은 신세였다. 자신이 없어서 어려운 취재는 내게 배당되지 않기를 바랐다.
2008년 10월. 전화가 걸려왔다. “○○일보 기자시죠. XXX입니다”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약 일주일 전 입수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서 접촉했던 사람. 모대학 교수가 마취제를 타서 제자를 성폭행하려 한 혐의로 경찰서에 고소장이 접수됐다는 정보를 선배가 입수한 것. 확인해보니 교수는 아니었다. 시간강사였다. 고민이 됐다. 언제, 어디서 발생한 사건인지 경찰서에서 확인이 안 됐다. 결국 학교를 상대로 취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조심스러운 취재였다. 결국 본인에게 먼저 전화를 했다. 본인은 할 말이 없다며 끊었다. 문자를 보냈다. “선생님께서 말을 안 해주시면 학교, 동료분들한테 물어 볼수밖에 없다. 그러면 더 소문이 난다.” 그러나 답은 안 왔다. 결국 하루가량 학생, 교수, 교직원 등 학교를 상대로 전방위로 취재를 해보았지만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라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 교수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라고 했다. 그 뒤 딱 일주일만에 당사자에게 전화가 온 것이다. 그는 “당신이 취재를 하는 바람에 소문이 났다. 이를 몰랐던 임신 중인 아내가 얘기를 듣고 쓰러졌다. 자기는 지금 모든 걸 잃었다. 아직 수사 중인 사안이다. 지금은 취재를 중단해달라. 때가 되면 자기가 모든 걸 얘기해주겠다” 나도 모르게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오히려 그가 “아니다. 기자의 일이니까 어쩔 수 없다. 하지만....부탁이다”라고 했다. 나는 죄송합니다라고 반복하다가 끊었다.
아내가 쓰러졌다. 아내가 쓰러졌다. 아내가 쓰러졌다. 임신중에... 아내가 쓰러졌다. 한숨이 나온다. 기자의 일.. 절대 도덕적인 일이 아니다. 나는 그날 하루종일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된 기분이었다. "넌 너무 말이 많아" 그가 나를 가둬서 15년간 감금한다해도 싸다.
-2008년 일기 중
지금 생각해보면 더 마음이 여린 시절이었다. 당시에도 동료들은 “죄값을 치러야 된다. 그놈은 그래도 싸다”고 한 사람도 있었고 “그게 니가 할 일”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결국 그 기사는 출고되지 못했다. 아마 내가 캡한테 더 이상 취재할 수가 없다고 얘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당사자는 그걸 노린 것일 수도 있다. 나중에 1년여 지나서 다른 언론에 검찰 기소 단계 또는 법원 판결 관련 기사로 성추행 사실이 보도됐던 것 같다. 나는 그때 계속 취재를 했었어야 했는지 모를 일이다. 독하지 못한 나는 훌륭한 기자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