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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무리 Jun 12. 2019

'애사심'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인가요

가질수만 있다면 저도 갖고 싶습니다.



10주년을 향해 무섭게 달려가는 회사 생활이 늘 불행했던 건 아니었다, 라고 말하고 보니 더 불쌍해지는 기분이지만, 정말 그렇다.


애증의 시간이었지만 회사 안에서 보람과 성취를 느끼고 좋은 사람을 만나고 인정과 안정에서 오는 행복감을 느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사이사이의 불만과 좌절과 수없는 싸이코 내지는 돌아이와의 만남은 이렇게 괄호 안에 두는 걸로)




대학생 때 PR 관련 수업을 들었었는데, 교수님께서 기업 홍보 담당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인거 같냐고 물어보신 적이 있다.


글쓰기 능력? 커뮤니케이션 스킬?


납득할 만한 답변이 오가는 사이 교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건 '애사심'이라고 하셨다.


거짓말도 하루 이틀이지 사람이 하는 일인데,

진심이 아니면 오래하기 힘들다고.



직장 생활을 이렇게 오래할 줄 몰랐던 이십 대 초반의 대학생에겐 전혀 이해가 되지 않던 말이었다. '회사'가 '애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니.





입사 후 나는 주로 경영진과 대면하여 일하는 부서에 있었던 터라, 사회 초년생 때부터 회사 임원들을 가까이서 만날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무릎을 칠만큼 놀라웠던 것은 이 분들의 한결같은 '애사심'이었다. (그렇다. 애사심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 나올 것 같은 비밀스러운 상상을 해보곤 했다. 회사의 어딘가에 아무도 모르는 '상무 공장'이 있는 게 아닐까. 그 공장에서 철저한 공정 관리를 거쳐 나온 상무들에게는 마지막 비밀병기 '애사심'이 한 방울씩 뿌려진다. 애사심이 탑재된 상무들은 조직 곳곳으로 흩어져 '로열티', '헌신', '희생' 같은 직원들에게 쉽사리 와 닿지 않는 말들을 설파하며 애사심 전도사가 된다, 라는 상상.


그 공장에서 나온 전도사들 중에서도 역대급 애사심으로 무장한 CEO를 만나 3년 가까이 일한 적이 있다. 정말 '애사심이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사장님이 아닐까?' '오너 회사도 아닌 기업에서 이런 로열티가 가능하단 말인가' 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는데, 어느 날 사장님이 정말 영문을 1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에게 물으셨다.


"O대리, (대리 나부랭이 시절이었음)"
"네, 사장님"


"내가 꼰대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 건데,
요즘 젊은 직원들은 왜 이렇게 애사심이 없는 걸까?"



여느 때 같으면 그저 어색한 웃음으로 대처했을 터인데, 순간 사장님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너무 안타까운데 정말 이유를 알 수 없고 답답하여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울 지경인 표정.


그 표정에 할 말을 잃었어야 하는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어 버렸다.


"애사심이 없는 게 아니라, 애사심을 갖는 방법을 모르는 건데요."



나의 뇌가 나의 입을 미처 막지 못하고 튀어나간 말이었다. 사장님은 대리 나부랭이의 대답에 더욱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이 되셨고, 나는 의식의 흐름처럼, 마치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것이라고 자동 완성 입력되어 있던 사람처럼 튀어나간 이 말의 의미를, 한동안 곱씹어 보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야 고백하건대, "애사심을 갖는 방법을 모르는 건데요."라는 말은 사실 "그 애사심, 저도 가질 수 있다면 갖고 싶어요!" 라는, 아주 작은 반항심에서 나온 말이었다. 가정을 돌볼 시간도 없이 회사와 일에만 올인하며 30년을 살아온 사장님의 삶이 부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회사와 함께 성장하고, 회사의 발전이 곧 나의 발전이었던 사람의 가슴속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마음이 '애사심'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는 알 것 같았다.


저렇게 자식을 키우는 애달픈 심정으로, 저런 열정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 느끼는 성과나 성취감은 대체 어떤 느낌일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 있겠지. 그러니까 가능한 거겠지. 고백하건대 한 번쯤 가져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철없던 대학생 시절, 말을 가려할 줄 몰랐던 대리 나부랭이 시절을 지나 '과장'이 되던 날, 승진자 사령장 수여식 날이 와버렸다. (현실감 무)


보통 승진자 사령장은 CEO가 수여하는데, 그날은 긴급한 회의 일정으로 사장님 대신 전무님께서 대리 수여를 하게 되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지금 생각해 보면 입사 이래 처음일만큼 드문 일이었다.


정말 1도 감흥이 없을 줄 알았던 승진자 사령장 수여식이었는데, 뜻밖의 상황으로 사장님이 아닌 전무님 앞에 서게 되었다.


전무님은 내가 사원이었을 때 우리 본부의 본부장님으로 오셔서 본부장, 상무를 거쳐 전무님이 되셨고, 나는 사원, 대리를 거쳐 그 날 과장이 되었다. 어쩌면 허망하게도 그렇게 각자 세 단어씩의 직급으로 간단히 정리될 수도 있는 시간이겠다.


나의 풋풋했던 사회 초년생 시절. 회사가 사옥을 세 번이나 이전하는 바람에, 서울을 돌며 평생 마실 술을 다 마신 것 같은 대리 시절. 나의 흑역사.


늘 '급변하는 경영 환경'이라며, '혁신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며, 항상 위기이고 언제나 변곡점이었던 애증의 회사. 그 안에서 버티고 견디던 시간들. 떠올리기 싫은 일부터, 그래도 가장 즐거웠던 어느 한 시절까지,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다'는 식상한 표현으로밖에 설명이 안 되는 기억들.


승진이 뭐라고, 사령장이 뭐라고, 종이 한 장인데.


그 종이 한 장을 주시는 분이 전무님으로 바뀌고,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던(기억이 미화된건가?) 그 오랜 시절을 함께 한 사람 앞에 서서 내 이름이 호명되는데,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 인생의 시나리오에는 없었던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수여식이 끝나고 단체 사진 촬영을 하는데, 전무님께서 오시더니 갑자기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셨다. 그러면서, 당연히 사장님이 주셨어야 할 사령장을 내가 주는데 기분이 이상했다고 말씀하셨다. 여기까지는 내 마음과 똑같았는데, 전무님께서 한 마디 더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직접 전해주게 되어 기뻤다고



아, 그제야 나 왈칵 눈물이 날 것 같던 이유를 알았다. 그 기쁨이 전해져서, 마음이 전해져서 였다.


함께 기뻐해 주는 누군가의 마음이.


고생 많았어.

함께 해서 기뻐.

이렇게 오랜 시간.


그런 마음.




이제야 교수님 말씀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조직에 대한 애사심은 결국 사람에게서 온다는 걸.


관계와 공유, 비슷한 것을 보고 느끼는 시간.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는 보이지 않는 연대와 같은 것.




이것이 결국 기업의 '비전'이 되는 게 아닐까.

이런 연대가 조직 구성원들의 마음속에 있다면, 선언적인 '비전'이나 ‘슬로건’은 이미 필요 없는 게 아닐까.


승진을 증명하는 사령장보다, 그 사령장을 건네 준 사람의 마음이 고마웠던 그 날, 나는 사람이 가질 수 없는 마음인줄만 알았던, 도무지 알 길이 없었던 '애사심'을 갖는 방법을 조금은 알 것 같은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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