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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무리 Jul 29. 2019

더 많은, 단단한 나를 만드는 일

우울할 땐 박나래처럼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장 달라진 점이 있다면, 회사에서 우울하고 분노할 일이 있어도 그 감정에 젖어 퇴근하는 일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회사 문을 나오면서 생각한다.


오늘의 빡침을 꼭 글로 써보리.


이렇게 생각하고 대충 저녁을 먹고 시원한 카페에 앉아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 월급을 주는 회사원이 본업인지, 글을 쓰는 일이 본업인지 헷갈릴 정도다. 글쓰기 소재를 발굴하기 위해 회사를 다니는 게 아닐까(하는 착각). 내일 또 출근해야 함을 알지만 그래도, 그런 행복이 있다.



언젠가 개그우먼 박나래가 본업인 코미디 프로그램의 아이디어를 밤새워 짜고 선보였는데 반응이 별로 좋지 않으면 예전엔 정말 절망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양한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개그우먼인 박나래가 있고, 여자 박나래가 있고, 디제잉을 하는 박나래가 있고, 나래바 사장 박나래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개그맨으로서 무대에서 남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까이는 것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게 조금 이해가 안 되더라도, 오케이 괜찮아. 디제잉하는 박나래가 있으니까, 다른 나래가 있으니까, 이렇게 사니까 너무 편해졌다고.


그걸 인지하고 있으면 하나가 실패하더라도 괜찮아요, 또 다른 내가 되면 되니까!

 

요즘 브런치 덕에 나도 자주 그런 마음이 된다. 스스로에게 참 감사한 마음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쩌면 그래서,

회사가 괜찮다가, 그만두고 싶다가 한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일도, 회사에서 하는 일도 어쩌면 '나를 갈아 넣는' 일 임에는 큰 차이가 없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도 백 퍼센트 행복하지만은 않다. 아무도 시킨 사람이 없는데도 노트북 앞에 '글쓰기 모드'로 앉기까지 미루기도 하고,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고, 온갖 딴짓을 다 해본다.


고치고 또 고치고, '퇴고'라는 이름으로 어쩌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단어 하나, 조사 하나 고쳐 쓰기를 수십 번. 그렇게 글 '발행' 버튼을 누르고 나면 글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내 것은 아니지만 한 편의 글은 온전히 그 자체로 남아있다. 조회수와 좋아요 숫자를 바라보며 느끼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은 확실히 내 것인 느낌이다.




그런데 요즘 회사 생활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 이유는 그렇게 나를 갈아 넣어 일해도 남는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소모되고 마모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 그런데 직장 생활이라는 게 원래 다 그런 거지, 하며 버티기에는 그것에 갈아 넣는 내가 아깝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시간도 노력도 감정 소모도. 내가 왜?


중2병도 아니고, 사춘기도 아니고, 삼십 대 중반 직장 생활 10주년을 앞두고 내가 왜? 라니. 나도 나 때문에 환장할 노릇이다. 오늘도 잠시 팀장님과 그야말로 소모적인 일의 끝판왕, 닥쳐 올 '안 해도 될 일'을 해야 할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잠시 감정이 격해졌었다.


그런데 요즘은 팀장님과 이런 논쟁을 하다 보면 예전처럼 격렬하게 반항(?)할 힘도 없고, 오늘은 이런 내 말을 들어주고 있는 팀장님이 문득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 사람도 힘들겠지. 어쩌면 나는 그냥 '어려운 부하직원'이 아닐까? 나름 소신과 진심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고, 영혼 없이 시키는 대로 일하는 직장인은 되지 않겠다고 최선을 다해왔는데, 서로 힘들기만 하지 이 무슨 소용이람, 하는 생각.




이렇게 직장 생활 중2병, 사춘기에 빠져들 때,

내일 바로 사표를 던질 수 없다면 개그우먼 박나래처럼, '나'라는 사람이 100이라면 직장인으로서의 '나'는 70이나 60인 것이 좋겠다. 그러면 70이나 60의 나를 갈아 넣어 없어져도 30이나 40의 나는 남으니까.


그게 글을 쓰는 나든, 명상을 하는 나든, 어떤 나든 간에. 더 많은 단단한 나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직장인으로서의 나를 제외하고 그 많은 '나'들 중에서, 저축은 못해도 '생활비 정도는 벌 수 있는 나'를 만드는 게 요즘 나의 가장 큰 바람이다. 그러니까 직장인이 아니어도 먹고살 수 있는 실마리를 찾는 일.


그러면 건설적인 퇴사도, 본격적인 다른 삶도 조금은 길이 보일 것 같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희미하게라도 실마리가 보일 때까지, 더 많은 나를 만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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