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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무리 Oct 07. 2019

회사에서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 일할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



1년 전쯤이었나, 안 좋은 일은 왜 다 몰아서 오나 싶게 유독 힘든 그런 때였다. 좋은 일은 몰아서 온 기억이 없는데 왜 이렇게 힘드나 싶은 때, 회사에서 TFT 하나가 종료되면서 업무 분장 조정이 있었다.


'변화혁신 TFT'라는 이름으로 야심 차게 추진되던 조직문화 업무가, TFT 종료와 함께 우리 팀으로 이관되었고, 결국 이 업무를 내가 속한 파트가 얼떨결에 맡게 되었다. 기존에 내가 맡은 파트 업무의 일부였기에 자연스러운 업무 이관 일순 있지만,


문제는 다시는 맡고 싶지 않은 업무였다는 것이다.


2년 전쯤 TFT가 생기면서 업무가 넘어갈 때 내심 후련했다. 3년 가까이 조직문화 업무를 담당했던 시기, 회사가 엄청난 변곡점이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변화관리 차원의 조직문화 정립과 전파였고, 그 답 없는 일에 내 육신과 영혼을 갈아 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과언이 아니라는 증거를 하나 들자면,


어느 날 뼈 때리는 각성과 아무 말 대잔치가 난무하던 CEO 주관 회의 때, 아 이제 정말 힘들어서 더는 못하겠다, 내가 죽겠는데 사장이고 뭐고 없다는 심정으로 외친 적이 있었다.


"사장님 저 이제 밤에 잠도 안 와요."


회의 석상의 모든 부장님, 팀장님들의 쟤가 돌았나? 하는 표정 사이로 유일하게 딱 한 사람, 사장님만이 감동받은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나도 그렇다고,

나도 회사만 생각하면 밤에 잠이 안 온다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나는 그런 공감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다 그만두고 싶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말한 것이었는데, 사장님은 나 같은 (회사 걱정에 밤잠을 못 이루는) 직원이 있다니 기특해 죽겠다는 얼굴로,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라는 위로와 격려까지 해주셨다.


그런데 그 무렵의 나는 정말 그랬다. 내 회사도 아닌데 내 회사인 줄 알고 일했고, 사장이 아닌데 사장인 것처럼 고민했다.


내가 생각했던 조직문화 업무는 정신신념에 관한 일이어서, 영혼 없이 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중간이 없는 일이었고 워라밸 같은 균형을 찾기도 어려웠다. 돌이켜보면 내 직장 생활에서 가장 일에 몰입했던 시기였는데, 혹독하게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성취와 보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가장 힘들었던 것은 '가랑비에 옷 젖는 일'을 하는 답답함이었다. 좋아질 것이라는, 나아질 것이라는 낙관과 희망을 가지고 추진해도 당장 변화가 눈에 보이지 않는데서 오는 답답함, 가끔은 안 해도 될 일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은 답답함, 다들 중요한 일 한다며 고생한다며 말은 하지만 정작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르는 것 같은 답답함, 이 일은 그저 묵묵히 하는 거야, 라는 마음과 아, 나도 성과가 눈에 보이는 티 나는 일 좀 하고 싶다, 라는 마음 사이에서 방황하는 답답함.


구글이니 아마존이니 봐봐, 기업문화가 제일 중요해, 다들 알고 있지만 막상 비용 절감이니 비상 경영이니 하면 제일 먼저 티 안나는 조직문화 예산 삭감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은근 자존심이 상했다. 사실 이게 담당자가 자존심이 상할일인가? 어쩌면 나는 그 시절 내 일을 정말 사랑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깎이지도 않은 예산에 자존심이 상할 만큼.

      


  


사실 상 손을 놓은 지 2년이나 지났는데 다시 조직문화 업무를 맡으라니. 애증 같은 감정이 있긴 했지만 자신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직장 생활 이제 10년을 바라보는 연차에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회사에서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환장할 노릇이었다.


당장 급한 대로 TFT에서 마무리하지 못한 마지막 프로그램을 덜컥 맡게 되었다. 이미 비용이 지급되었으니 반드시 진행되어야 하는 TFT에 남겨진 마지막 업무였다. 회사의 임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리더십 프로그램이었는데, 때마침 인사 발령으로 대상자도 일부 변경되어 신임 임원분들께 일일이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을 하러 다녀야 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회사에 새로 오신 신임 임원이셨던 상무님을 찾아가 여느 때처럼 프로그램의 취지, 방법, 사전 과제, 워크숍 일정 등을 설명드리려는데, 갑자기 상무님께서 나에게 물으셨다.


"조직문화 업무... 힘들죠?"


커리어의 백그라운드가 조직문화와는 전혀 관련이 없고, 오다가다 가끔 안면이 있는 정도의 상무님이셨다. 갑작스러운 질문이 당황스러웠는데 이상하게 울컥하는 느낌이었다. 영혼 없이 들어갔다 갑자기 마음에 불이 확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


"네. 힘들어요."


"그럴 거야. 가랑비에 옷 젖는 일, 해도 안 해도 티 안나는 일, 성과가 나는지도 모르겠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 외로운 일. 그런데, 누군가는 신념을 가지고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갑자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상무님 방에서 그대로 눈물을 흘릴 순 없었기에, 횡설 수설 하려던 말을 마치고 황급히 나왔다. 앞으로 잘해보자는 상무님의 마지막 말에 조금 부끄러운 감정마저 들었다. 나에게 지금 그런 '신념'이 남아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두려운 게 아닐까.


'일'이라는 것에서 한 발 떨어져 테두리에 살짝 발을 걸친 채로 영혼 없이 일하면 확실히 육체적, 정신적 피로도가 낮아지긴 했다. 그런데 딱히 재미는 없었다. 뭐 재미는 일이 아니라 다른 데서 찾으면 되지, 라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다시 '신념'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 주어지고 보니, 직장 생활 10주년 짬밥의 힘을 느낀다. 내일 모래 10년 차라도, 회사에서 하고 싶은 일만 하고 하기 싫은 일은 안 할 재간은 없지만, 이제 하기 싫은 일을 어떻게 할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영혼 없이 할 것인가,  신념을 가지고 할 것인가.

이 괴로운 선택지 앞에 서 있다.  

 




** 덧붙여, 약간의 뒷조사(?)를 통해 뒤늦게 안 사실인데, 나에게 다시금 ‘신념’을 고민하게 한 그 신임 상무님은 조직문화 관련 업무 백그라운드는 아니시지만, 대형 프로젝트를 맡을 때마다 항상 변화관리나 조직문화 쪽을 담당해 오셨다고 한다. 30년을 해도 여전히 어려운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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