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봄, 그리고 2019년 여름의 드라마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을 보았을 무렵 나는 서른 살이라는 나이가 까마득했다.
결혼중개회사에서 노처녀 취급을 받고, (아 '노처녀'라는 단어를 쓰면서 매우 생경한 느낌마저 들었다. 노처녀라니 이 무슨 비하 발언인가. 이런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던 시절이 있었다니!)
가족들에겐 결혼도 안 한 문제 많은 딸에, 삼식이 현빈에겐 그냥 아줌마. (삼순이만 그런 건 아니다. 드라마 속 현빈이 프렌치 레스토랑 대표였는데 나이가 27살..... 요즘이라면 그저 취준생일 나이...)
실제로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 정보를 찾아보면 대놓고 '예쁘지도 않고 날씬하지도 않으며 젊지도 않은 엽기 발랄 노처녀 뚱녀' 라고 나온다. 갑분뚱녀... 아니 2005년은 대체 어떤 사회였던 것인가.
그럼에도 이 드라마에 푹 빠져 살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것은, 요즘은 흔한 연하남과의 가슴 떨리는 사랑이나, 삼순이의 성장 드라마나,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멋있는 다니엘 헤니의 대체 불가 독보적 젠틀멋짐이나, 눈물을 뚝뚝 흘리며 현빈에게 뼈 때리는 대사를 날리던 려원의, 사랑이 내 뜻대로 안 되는 사람의 현실 연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그 시절의 '나' 다. 당시 서른 살이 정말 오나 싶게 아득했던, 지금 생각하면 한없이 어린 내 나이. 그 시절 백지 같았던 서른 살에 대한 느낌. 그 백지에 무엇이든 그리고 마음껏 상상할 수 있었던 자유. 이 모든 것을 품을 수 있었던 나의 마음 말이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2019년, 서른 살의 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 '멜로가 체질'을 보고 있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인데 이리도 현실적일 수가.
주인공들은 백수이거나, 백수가 되었거나. 재능은 있는데 좀처럼 인정을 못 받거나, 대놓고 무시를 당하거나. 아이는 있는데 남편은 없는 워킹맘이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자주 혼잣말을 하는 사람이거나.
세상은 의외로 뜻대로 되는 일이 잘 없다. ’인생사 새옹지마’ 라지만 나쁜 일 뒤에 좋은 일이 와도 나쁜 일이 없던 일이 되거나 이젠 괜찮은 일이 되지는 않는다. 상처는 언제 어디서든 나를 갉아먹는 좀비처럼 자존감을 끌어내리고, 순간의 실수도 돌이키거나 회복하는 데는 영원의 시간이 걸리는 듯 막막하다.
분명 2005년 '내 이름은 김삼순'의 서른 살은 나에게 드라마였는데, 세상이 변한 걸까. 아니면 드라마의 작법이 변한 걸까. 이유를 찾다가 바보같이 깨달았다.
아, 내 나이가 변했구나.
'내 이름은 김삼순'을 보던 20대 초반에서, '멜로가 체질'을 보는 지금 30대 중반의 나이.
'내 이름은 김삼순'을 보며 품었던 무엇이든 그릴 수 있을 줄 알았던 백지 같은 서른 살은 어디 갔나 싶다. 기대했던 서른 살은 '당당하고 멋진 어른' 정도였던 것 같은데.
주량을 제대로 모르고 술을 많이 먹어 숙취로 당당하지 못한 아침이 자주 있었고, 회사에선 그저 대리 나부랭이에, 결혼은 커녕 연애조차 '사람 마음이 내 맘 같지 않다는' 교훈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당당하고 멋진 어른 보단 찌질하고 모양 빠지는 기억이 참 많았는데, 이상하게도 그 시간이 후회가 되지는 않는다.
돌아가도 별다른 선택지가 없을 만큼 나는 그 시절 열심히 놀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탐구했다. 그
덕에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이 깨달음은 다행히도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덜 아깝게 해 주었다. 그럼에도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이지만 덜 후회하게 해 주었고, 후회하고 실패하더라도 빨리 회복할 수 있는 탄력을 주었다.
'회복 탄력성'
이 힘이 나를 조금씩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망설일 만큼 망설이고, 고민할 만큼 고민하고서야 간신히 한 발을 내밀던 나를,
할까 말까 고민되면 그냥 하는 사람, 좀 더 도전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로 인해 내 인생은 좀 더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드라마 속 서른 살 주인공들을 보면 무한한 응원을 보내고 싶어 진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던지, '이 또한 지나가리라' 같은 마이웨이 응원 말고.
아니다. 어쭙잖은 응원 말고 그냥 이 서른 살을 지켜보는 것으로 해야겠다. 그래, 드라마니까. 지나고 보면 아는 시간들이 있으니까.
후회를 덜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후회를 많이 해보는 게 아닐까. 후회로부터 회복하는 나만의 탄력성을 배울 수 있게 되니까.
서른 살은 그런 나이니까.
** 한 가지 덧붙여, '멜로가 체질' 이 드라마가 좋은 이유는 왕싸가지 ㄱㅆ마이웨이 그런데 어딘가 진심이 느껴지는 천재 능력자 PD로 나오는 손범수 역할의 캐스팅이다. 보통 이런 캐릭터는 현빈이 기본 원빈, 강동원이 정석, 뭐 요즘은 박서준 정도랄까? 그런데 안재홍이라니!! 딱 고 정도의 외모라니!! 첫 등장부터 웃겨서 박수 치며 뒤로 넘어갔다.
현실美란 이런 거잖아요? 안재홍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