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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란지교 Jan 04. 2021

버리면서 시작되는 이야기

오래된 책장에서 만나는,  진로 유목민의 흑역사 (INTRO)

올 새해는 대청소로 시작했다. 오래된 책장 속 썩어가는 책들을 치우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비움이 한 해의 시작이라니(!), 너무 멋지다며 나 자신에게 억지스러운 동기부여를 해줬다. 그게 뭐라고 몇 년을 미뤘을까?! 

육신의 게르음이 첫째 이유였지만, 정직하고 사실적인 둘째 이유가 있다. 정리란 모름지기 버리는 것이고, 버리기 위해서는 분류를 해야 하며, 분류는 또한 사려와 숙고가 필요하다. 어디까지 버리고 어디까지를 안고 갈 것인가. 그 선택의 노동을 시작하기가 어려웠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미루기만 하는 나 자신이 지겨웠다. 일단 몸부터 움직였다. 오래되고 그늘지고 먼지 쌓인 책장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봤다. 잊고 있었던 나의 진로에 대한 고민, 관심사, 경력, 경험 등이 튀어나왔다. 나의 치기 어린 열정과 세상 물정 모르고 덤볐던 시간들이 소환되기도 했다. 그 시간에 함께 했던 그리고 지금은 근황을 알 수 없는 사람들도 떠올랐다. 나쁘지만은 않았다. 잠들어 있었던 세포들이 자극되기도 했다. 역시 미루고 미뤄 두었던 또 하나의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싶어 졌다. 


집콕하면서 나만의 간단한 브런치를 먹으면서, '브런치'를 자주 읽는 요즘이다. 브런치에 꾸준히 글을 연재하는 분들은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그 내용이면 내용, 경험도 경험이지만, 꾸준히 글을 쓰는 시간을 낸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도 오래전부터 브런치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시작하기가 어려웠다. 이런저런 구성을 해 놓고도 노트북 앞에 앉기까지에는 여러 장애물이 너무나도 많았다. 어쩌면 시간 부족보다 더 큰 장애물은 '이제 더 이상 실망하기 싫다'는 내면이었을 것이다. 쓴다고 뭐가 달라질 것인가! 글 쓰는 과정을 즐기는 아름다운 문인이 되고 싶지만, 사실 은근히 결과를 기대하게 되는 닳고 닳은 인간이 나였다. 시간을 쪼개고 에너지를 탕진하여 글을 쓴 후에 무엇이 나에게 남게 되는가? 이미 오랜 시간, 여러 분야에서 그런 노력과 에너지를 쏟아 봤다. 그리고, 내 안에서 끼가 발견되지 않거나 원하는 결과가 도출되지 않으면 실망하는 과정의 연속도 20년이나 흘렀다. 그것들의 흔적은 책장 속 책들이다. 책장 정리처럼, 브런치를 '쓰기' 망설이고 미뤘던 이유다. 멋지고 대단한 남들이 써 놓은 브런치의 글들을 커피 홀짝 거리면서 소비만 하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하고 즐거웠다.  


정리는 시작되었고, 버리려는 책들이 하나둘씩 쌓여 가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리적인 책을 버리는 대신에 그 책들이 필요했던 나의 순간들, 그리고 그것들이 나에게서 일어났던 20년 간의 화학반응들을 글로 남기고 싶어 졌다. 열매가 있던 없던, 남들이 멋지다고 느껴주든 말든.....  내 나름 느끼고 깨달았던 흑역사들을 제3의 공간에서 채워보고 싶어 졌다. 없애 버리고자 하였던 목표가, 새로운 채움으로 변이 되고 있었다.  


 

* 갑자기 추억 한 모금_ 나의 '책장'과는 전혀 상관없는,  상하이 '신화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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