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먼 길 떠나기 전에 노란 리본을 묶어 드리지요.
P는 동기들과 학교 근처 포장마차에서 대낮부터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미 거절하기 힘든 상황임에도 선뜻 내키지 않는 이유는 어머니도 있지만, 군대까지 착실히 기다려준 L이 신경 쓰이는 것도 있다. 제대할 날만 기다리고 있던 여자 친구에게 알프스로 간다고 말하면 대놓고 실망하는 그 얼굴이 눈앞에 그려진다. 친구들이 옆에서 알프스 원정에 이런저런 말을 보태도 머릿속에는 어떻게 L에게 이야기를 꺼낼지만 생각하는 중이다.
술자리가 대충 정리될 무렵 혼자 털레털레 L의 집 앞으로 걸어갔다. 지금 가서 얼굴을 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발이 저절로 L의 집으로 향한다. L이 사는 집은 사거리 모퉁이에 있는 2층 양옥집이었고 맞은편에 있는 미용실 앞에 평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P는 제법 취한 채로 평상에 앉아 긴 한숨을 쉬었다. 술냄새가 긴 숨에 섞여 나오고 자신이 내뱉은 숨에 또 취하는 것 같다. 지금 시간이 9시쯤 됐으려나... 선뜻 불러내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같은 시간 L은 골목 어귀에 있는 큰어머니 댁에서 저녁을 먹고 정리한 뒤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본집인 2층 양옥집에는 L과 두 남동생이 살고 자매들은 골목 돌아서 마당 있는 큰 어머니댁에 살고 있었다. 자매들과 우애가 좋았던 L은 고민이 있을 때마다 여동생들과 밥을 먹고 한참을 이야기하다 오곤 했다.
너무 늦지 않게 집에 돌아오려 슬리퍼를 탈탈 끌고 돌아오는데 집 맞은편 평상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과 서운한 마음이 뒤섞여 모른척 지나갈 생각도 했지만, 발이 저절로 그 앞으로 가고 있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여기서 뭐해?
오... 나왔네? 어디 갔다 왔어?
큰엄마 집에서 밥먹고 왔어. 또 술 많이 마셨어?
잠깐 앉아봐...
으이그... 또 말 돌리지?
못 이기는 척 앉았지만 기우뚱 휘청이는 P를 보니 마음이 심란하다. 무슨 말을 하러 온 건지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 같다. 주택가의 저녁 9시는 모두 잘 준비를 하는 조용한 시간이었다. 술냄새 섞인 숨소리만 한참을 듣고 있었다. L은 이 무뚝뚝하고 표현할 줄 모르는 남자와 사귀면서 미묘한 표정이 말하는 것, 숨소리의 뉘앙스를 읽는 법을 배웠다.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 때문에 그것이 사랑이 되기도 하고 상처가 되기도 한다.
L은 말없는 그의 근심어린 얼굴과 숨소리와 약간 먼 곳을 보는 초점 없는 눈빛에서 읽었다.
'이 사람은 지금 나에게 상처가 될 말을 아끼고 있구나.'
갔다 와.
...... 알프스?
응, 원정 고민하는 거 아니야?
한번 가면 오래 못 볼 텐데.
그래도 지금 아니면 언제 스위스에 가보겠어?
자존심이 앞선 걸 수도 있다. 그래도 이것만큼은 진심이었다. 가난한 집에서 나고 자란 P가 유럽이란 곳을 가고, 새로운 문화를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많은 위험부담을 감수하고라도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많은 기대를 받는 남자 친구가 무엇 때문에 고민하는 지도 잘 알기 때문에 조금 짐을 덜어주고 싶었다.
가면 위험한데?
안 위험하게 갔다 오면 되지!
죽을 수도 있는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발끈해서 소리를 버럭 지르고 눈을 흘기는 걸 보니 내 여자 친구가 맞는구나. 서로 쌓은 시간이 많아지면서 예상치의 반응이 나오는 걸 보는 게 참 즐거웠다. 일부러 짓궂은 장난을 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늘 알고 있는 발끈한 얼굴을 보는 것. 그래도 오늘 L이 해준 말은 평소와는 달랐다. 믿음이 묻어나는 목소리. 그리고 그 밑에 숨은 애써 불안을 숨기는 마음이 읽히는 순간, 드디어 여자 친구의 마음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말없이 손을 꼭 잡았다. 차가운 L의 손을 꼭 쥐는 P의 손은 손난로처럼 뜨끈했다.
조심히 다녀올게.
그래.
알프스 원정이라는 거사를 앞두고 산악 연맹의 선후배들이 모여 술자리를 가졌다. 준비하는 동안 체력관리, 응급처치, 암벽 등반 연습을 수도 없이 했지만, 그래도 한국 땅의 산과 타국의 산을 오르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선배들은 십시일반 모아 원정비를 지원했고 많은 후배들도 무사 귀환을 기원하며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그 왁자지껄한 분위기 한편에는 P와 친구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L과 친구들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야, 근데 너 대단하다.
뭐가?
남자 친구 군대도 기다렸는데 또 알프스 간다는 걸 보내줘?
내가 보내주고 말고 할게 뭐 있어?
와... 얘 완전 신여성이네!
자기가 가고 싶으면 가는 거지.
가고 싶으면 가는 거라고 말하기엔 너무 등 떠밀린 감이 없지 않지만서도 대학생활의 낭만이란 무모한 도전과 새로운 세상을 배우는 게 아니겠나. 알프스 원정이라는 거창한 목표 아래 원정대를 응원하는 사람들 사이로 유럽에 대한 동경과 위험한 등반에 대한 우려, 떠나는 대원들의 화려한 전적을 읊어대는 말들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L은 사람들 사이로 술에 잔뜩 취해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P를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내일이 출발인데 컨디션 조절도 안 하고 무리해서 마시는 것 같아 또 속이 뒤틀린다. '비행기 타면 멀미나 실컷 해버려라.'
다음날 술이 덜 깬 채로 저녁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모였다. 원정대원들을 보내는 마지막 자리는 부모님들과 애틋한 이별을 하는 엄숙한 분위기였다. 조심히 잘 다녀오라고 연신 내 자식 같은 아들들의 손을 쓰다듬는 어머니들. 그 순간은 누구 한 명의 어머니가 아니라 모두의 어머니들이 되는 것이다.
그 순간에도 L은 한발 떨어져 P가 어머니와 충분히 작별 인사를 할 수 있게 기다려 주고 있었다. 탑승 시간이 임박해서야 P와 시선이 마주친 L을 밀려오는 감정을 어쩔 줄 몰라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P는 말없이 키 작은 여자 친구를 꽉 끌어안았다. 작고 마른 몸집이 품 안에 쏙 들어왔다. L은 늘 그의 든든한 품에 안기는 것을 좋아했다.
잘 다녀올게. 울지 말고.
L은 자기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에 눈가를 벅벅 닦아냈다. 목이 매어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P는 두툼한 손바닥으로 품 안에 꼭 안은 L의 등줄기를 연신 쓸어내렸다.
도착해서 전화할게. 엽서도 가끔 보낼게.
응. 응...잘 갔다 와...
늘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약속하는 사람은 못내 든든한 안심을 준다. '내일도 아무 일 없을 거야. 위험한 일은 없을 거야.' 그렇게 약속하는 것 같아서 내일이 불안한 마음을 조금 내려놓는 것이다.
내일도 사랑할게.
내일도 함께 있을게.
씩씩하게 손을 흔드는 P를 보면서 L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내일도 모레도 기다릴게. 전화가 되었든, 엽서가 되었든. 건강하게 돌아와.' 만남과 이별이 오고 가는 공항에서 먼길을 떠나는 남자와 여자는 그렇게 내일을 약속했다. 묵직한 P의 등짐에는 L이 매어준 노란 리본이 달랑달랑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