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뚱이에 관한 이야기(2)
몸에서 생성되는 불쾌한 감각을 인지합니다.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습니다. 좋아해서 집착하게 되면 고통이 되고 싫어해서 혐오하게 되어도 고통이 됩니다. 모든 감각은 생성되고 유지되고 소멸합니다. 깊이 숨을 들이쉬며 몸의 감각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옆으로 다리를 찢고 상체를 숙이는 요가 자세, 우파비스타코나아사나. 다른 단어로 박쥐 자세라고 부른다. 5살 때 다녔던 발레 학원에서도 제일 뻣뻣했던 나는 여전히 고관절이 뻣뻣하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허벅지 안쪽 내전근과 뒤쪽 햄스트링을 느끼면서 흘긋 옆을 본다. 곧게 다리를 180도로 찢고 배를 바닥에 붙이고 편안하게 숨을 쉬는 사람도 있다. 내 뒷자리에서 다리를 찢고 있는 남자분은 연세가 지긋해 보임에도 우아한 자세로 아사나를 소화한다. 괜히 경쟁심이 생겨 몸을 앞으로 더 숙여봐도 영 신통치 않다.
27살에 독일 유학생활을 포기하고 배달음식 장사를 시작했다. 인건비를 아끼겠답시고 일주일에 7일 하루 12시간을 일했다. 재료 준비하고, 청소하고, 주문받고, 포장하고, 서빙하고, 가까운 곳은 직접 배달까지 갔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나자 종아리가 퉁퉁 붓고 발바닥을 디딜 수도 없이 아팠다. 족저근막염과 하지정맥류 진단을 받았다. 푸른 정맥이 울퉁불퉁 종아리에 보이는 게 볼썽사나웠다.
태어난 후로 단 한 번도 말라 본 적이 없다. 팔다리가 가녀리거나 쇄골뼈에 물을 담을 만큼 깊은 적도 없었다. 다리가 날씬하거나 매끈한 적이 없다. 사춘기 때 급격히 체중이 늘자 허벅지에 튼살과 셀룰라이트가 남았다. 그래도 걷거나 달리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고민이 있을 때마다 2~3시간 산책을 나갈 수 있을 정도였고, 마음만 먹으면 등산도 무리 없이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다리가 아프면서 걷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절뚝절뚝. 조금만 서 있어도 종아리가 탱탱하게 부어올랐다.
할머니는 내 두꺼운 허벅지를 보고 저녁을 먹지 말라고 했다. 지금도 예쁘게 엉덩이를 씰룩이면서 걸어야 남자들이 쫓아온다는 말을 듣는다. '요즘엔 그렇게 쫓아오는 남자를 스토커라고 불러요 할머니.' 밤이든 낮이든 씰룩이는 내 엉덩이를 보고 쫓아오는 남자라면 공포 그 자체다. 저녁을 먹지 말라는 할머니의 말에 씩씩하게 밥 두 공기를 먹었다. 내 앞에 이것저것 반찬을 밀어주는 할머니야말로 츤데레의 전형이다. 막상 잘 먹으면 예쁘다고 하실 거면서.
하지정맥류와 족저근막염을 치료하는데 6개월 정도 걸렸던 것 같다. 매주 정형외과와 한의원을 다니면서 정형외과에서는 물리치료를 받고 한의원에서는 전기침을 맞았다. 초음파 기계로 종아리 근육을 마사지할 때마다 절로 비명이 터졌다. 한의원에서 고슴도치처럼 바늘을 꽂은 다리에 전기가 찌릿찌릿 흘러들어올 때마다 한숨이 새어 나왔다. 비명과 한숨을 반복하면서도 다리는 쉽게 낫질 않았다. 미용적으로 예쁘지도 않고 기능적으로도 뛰어나지 못한 내 다리를 많이 싫어했다.
사람은 자신의 약점에 집착하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다. 내 다리를 싫어하니 지나가는 사람들 다리만 쳐다보게 됐다. 다들 나보다 늘씬하고 매끈해 보였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들을 보면 부러웠다. 광고판 속 여자 연예인들의 다리는 쇠젓가락처럼 곧고 광택이 난다. 포토샵과 조명 덕분이겠거니 생각해봐도 영 무시하고 지나갈 수가 없다. 내 허벅지는 다른 여자들의 다리보다 두배는 두껍고, 튼살에 울퉁불퉁한 셀룰라이트도 모라자 푸른 정맥이 튀어나오기 까지 한다. 가지가지한다는 건 내 다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원망하는 마음을 담아 부은 다리를 주먹으로 툭툭 쳤다.
요가 수업이 끝나갈 무렵 선생님이 말했다. 다리를 끌어모아 양 팔로 꼭 안아주라고. 허리를 둥글게 말고 무릎을 접어 가슴으로 허벅지와 종아리를 끌어안았다. 팽팽하게 늘어났던 근육에 긴장감이 남아서 다리를 접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가슴과 다리를 밀착해 웅크리고 사이 빈 공간으로 얼굴을 밀어 넣자 뱃속 태아와 같은 자세가 되었다.
걸을 수 있고 뛸 수 있게 해주는 다리에게 감사하다고 말하세요.
그동안 얼마나 다리에게 가혹했는지 생각해본다. 예쁘지 않아서 미워하고 원하는 만큼 움직여 주지 않아서 싫어했다. 묵묵히 자기 역할을 다 해주었건만 알아주지 않은 건 내 안의 열등감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몸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상대적으로 내 몸을 미워하게 만든다. 부족하다고 다그치게 한다.
그날은 아파트 25층까지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발이 나의 의지에 따라 움직여 주는 것을 느껴본다. 숨이 가쁘고 심장이 쿵쿵 뛰면서 피가 전신을 바쁘게 돌아다닌다. 모든 근육들이 일제히 협응해 나를 한 칸 한 칸 위로 밀어준다. 20층에 다다랐을 무렵 울컥 눈물이 터졌다. 어두컴컴한 아파트 계단에 훌쩍 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할 수 있는데 왜 못한다고 했을까.'
이건 다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내 인생에 대한 문제다.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한 것들, 할 수 있는데 두려워서 못한다고 했던 지난날의 선택들이 떠올랐다. 내 의지에 맞춰 나의 두 다리는 이렇게나 충실하게 일해주는데 주저앉아서 다리만 원망했다. 그렇게 내 재능을, 환경을, 부모를 원망하면서 허송세월 한 것이 아까웠다. 할 수 있는데 왜 못한다고 했을까.
훌쩍거리면서 25층에 다다랐다. 무슨 일이든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한다. 태어났으면 심장이 저절로 멈출 때까지 살아야 한다. 내 심장은 쿵쾅대면서 나를 위해 일해주고 있으니 내 멋대로 멈추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 비장한 삶의 각오 같은 것을 하면서 다리를 툭툭 두드려 줬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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