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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조각 Oct 07. 2022

불만족을 견디는 법을 배웠어

Daer T.S.

    미친 사람도 아닌데 새벽 1시 30분에 집 밖을 뛰쳐나가 엉엉 울면서 놀이터를 걸어 다녔어. 주기적으로 우울이 찾아온다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지. 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불만족을 울음으로 토해냈단다. 불행도 아니고 불만족이라니, 이게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싶겠지. 그런데 이 단어만큼 정확하게 내 심경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없어. 나는 지금 모든 것에 불만족을 느끼고 있어. 불만족. 만족하지 못함. 이것은 무언가 미완성이고 부족하고 결핍되었을 때 느끼는 공허감이지. 다 완성되지 못한 퍼즐의 빈자리와 다 채워지지 않은 항아리의 빈 공간에서 느껴지는 실망감이야. 그러니 이 지독한 불만족은 나의 욕망이 만든 부푼 기대감을 도저히 채울 수 없는 비루한 현실에 대한 공허와 실망인 셈이지.


    늘 허황된 꿈만 늘어놓는 나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점점 늙어만 가는 거울 속의 얼굴에 만족하지 못하고, 어딘가 자꾸 내 길이 아닌 것만 같은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내 사람이 아닌 것만 같은 관계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콧대 높은 야망을 따라가지 못하는 위태로운 재능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 모든 것들에 압도되어 휘청이는 나에게 만족하지 못하지. 그래. 나는 나에게 만족하지 못해. 나 자신이 이 불만족의 원천이지.


    왠지 공허한 뱃속에 음식을 잔뜩 밀어 넣기도 한단다. 감정적인 허기는 육체적인 허기와 헷갈리기 쉬워서 무언가 허전하다고 느낄 때마다 영양가도 없는 음식을 채 음미하기도 전에 씹어 삼키지. 어떻게든 이 허전한 기분을 달래려고 꾸역꾸역 뭔가를 씹어 삼켜. 맛과 향과 질감을 생생하게 느낄 새도 없이 뱃속을 가득 채운 음식물이 위 점막의 피부를 어루만지는 것 같아.


    인간의 소화기관을 아주 간단하게 표현하면 원통형의 휴지심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니? 우리는 입과 항문 사이의 긴 통로를 가진 텅 빈 존재란다. 입으로 넣은 음식들은 긴 통로를 거쳐 분해되고 흡수되어 항문으로 배출되지. 바깥쪽 피부와 목구멍, 식도, 위, 소장, 대장, 항문에서 다시 바깥 피부로 연결되어 있어. 그래서 가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채 손이 닿지 않는 안쪽 피부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행위 같기도 해. 감정적 폭식 때문에 먹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내 말을 이해할 거야. 누군가에게 부드럽게 안기는 것처럼 음식이 나를 충만하게 채워주는 것 같은 그 느낌을 말이야.


    음식으로 뱃속의 허기를 채우는 것처럼 나는 관계와 감정에 굶주린 사람이 되고 말아. 반쪽짜리 사랑에 집착하고 상대를 통째로 집어삼키려고 하지. '너는 내 사람이 되어야 해.'라는 그 눈먼 집착에는 어떻게든 이 허무한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절박함이 있어. 사랑이 나를 구원할 것이라 믿고, 열정과 욕망이 지속되리라 기원하지. 그러나 끝내 깨닫고 마는 것은 '인생은 홀로 와서 홀로 가는 것'.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감정들은 공허한 삶의 의미를 밖에서 찾으려는 욕망이야. 어린 시절부터 무의식적으로 학습한 낭만적 환상이고, 유년시절의 결핍을 투사하는 거울일 뿐이야. 그러니 '연인'이라는 사람 앞에서 날마다 나는 지독한 외로움에 직면한단다. 사랑한다는 말의 무게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고 그 말을 뱉을 때마다 거짓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 내가 사랑한다는 말을 뱉었을 때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어. 그러니 나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는 지독한 이기심일지도 모르지.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도서관으로 가. 음식을 폭식(暴食)하는 것처럼 책을 폭독(暴讀)하지. 꾸역꾸역 머릿속에 밀어 넣는 활자들은 뒤죽박죽 자리를 못 잡고 굴러다녀. 그럼에도 끊임없이 정보를 찾아 습득하려 하지. 대체로는 의미 없는 것들, 중요하지 않은 것들,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이지. 그러나 머리를 잠시라도 쉬게 만들면 견딜 수 없는 불만족이 떠올라. 지금의 인생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멈출 수가 없어. 나는 절박하게 무언가를 찾고 있단다.


    흔히들 예술은 굶주림에서 나온다고들 하지. 그것이 육체의 굶주림과 경제적 궁핍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야.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다니게 만드는 감정적인 굶주림도 있어. 더 아름다운 것, 더 새로운 것, 더 나은 것, 더 의미 있는 것, 더 가치 있는 것을 찾아 헤매는 그 굶주림이 인류사에 남을 음악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건축물을 만들었어. 그들이 위대한 예술작품을 남기기까지 견뎌야 했을 불만족의 시간들을 상상해봐. 상상하는 색채를 구현하지 못하여 절절매고, 완벽한 화성을 찾아 수백 번 건반을 두드리고, 머릿속의 완벽한 설계도를 가지고 현장의 인부들과 씨름하는 것을 떠올리면 불만족을 견디는 인고의 시간들이 얼마나 괴로운지 알 수 있겠지? 그 불만족의 시간을 견뎌내고 끝내 완성한 작품에 만족했을까?

35세의 자화상(1876)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는 말년에 류머티즘 관절염을 심하게 앓았어. 그럼에도 붕대로 붓을 손에 감거나 입에 물고 계속 그림을 그렸다고 해. 뒤틀리는 손가락의 통증이 전신으로 퍼져 끙끙 앓다가도 그는 "나는 매일매일 발전하고 있어."라고 말했단다. 그렇게 말한 다음날 죽었지. 예술가의 삶이라는 것은 그렇게 절박하게 더 나은 것을 찾아가는 삶이야.


    나는 늘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단다. 그 말은 한 번도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해본 적이 없다는 뜻이지. 이 타오르는 갈증이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 너는 알고 있니?


With Love

2022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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