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한 편의 글이 되지 못한 조각 글 모음
먹고사는 일상들이 우리를 지치게 할 때가 많습니다. 월급은 그대로인데 장바구니 물가는 오르고, 아주 소박한 한 끼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게 느껴질 때가 많죠. 요즘 저는 일도, 인간관계도 여의치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글도 잘 써지지 않아 쓰다만 글들이 점점 쌓여가고 있죠.
반드시 한 편의 글이 2000자를 넘겨야 한다거나, 특별한 교훈을 담아야 한다거나... 그런 규칙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글을 쓰고 다시 읽었을 때 '이 정도면 된다.'라는 내적 만족감은 있어요. 내 글이 마음에 들어야 업로드를 할 수 있죠. 이것도 저것도 다 마음에 들지 않을 때면 글 한편을 끝내기도 어려워집니다. 그렇게 변비처럼 쌓인 글들을 보면 다시 한번 나의 재능을 의심하게 돼요.
그리스 신화에는 9명의 뮤즈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저마다의 재능을 통제하고 인간에게 나누어 준다고 해요. 무사, 무사이, 혹은 뮤즈라고 불리는 여신들은 워낙에 변덕스러워 인간에게 바라지도 않은 재능을 주기도 하고 멋대로 거둬들이기도 합니다. 그리스인들은 우리의 재능이 제멋대로 자라고 뜻하기 않게 시들어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나 봅니다.
먹고사는 일을 이렇게 변덕스러운 재능에 기대기 꺼려지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늘 먹고살아야 하니 수입이 일정하기를 바라는데 재능은 언제 꽃 피우고 시들어버릴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글쓰기로 먹고살다가 어느 날 내 글이 팔리지 않게 되거나 괜찮은 글을 쓰지 못하게 되어버린다면 어쩌겠어요. 비단 저만이 아니라 많은 브런치 작가분들이나 어린 시절 꿈을 품고 사는 분들은 공감하실 거예요. 춤, 노래, 그림, 글쓰기, 음악 등등 창작의 분야 곳곳에서 많은 작가분들이 이런 고민을 품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확신하냐고요? 최근에 좋은 책을 한편 읽었거든요. <나는 예술가로 살기로 했다>라는 비장한 제목의 책은 창의력 코치인 저자가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의 창작과정을 도와주는 메일을 묶은 책입니다. 이 책의 첫 챕터가 '밥벌이가 되지 않는 글쓰기, 포기해야 할까?'입니다. 누가 제 상황을 그대로 써놓은 듯한 책이어서 읽고 나면 조금 덜 외로워져요. 나만 이런 고민을 하는 게 아니라는 안도감과 연대감이죠.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뮤즈들의 탄생은 바람둥이 신 제우스가 전쟁의 승리를 기록하기 위해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와 동침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예술적 영감의 어머니는 기억인 셈이니, 기억과 기록을 뒤져보면 떠나버린 뮤즈들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런 이유로 채 한편이 되지 못한 조각 글들과 사진첩을 뒤적여 한편으로 묶어봅니다. 멈추지 않고 나아가다보면 동정심 많은 여신들이 저를 갸륵하게 여겨줄지도 모르죠.
밤늦게 일을 마치고 빈 속이 허전할 때 누군가 나를 위한 식사를 만들어준다면 참 기쁘겠죠. 이 날은 동생이 항정살과 청경채, 양파를 굴소스와 간장으로 휘리릭 볶아 근사한 야참을 만들어 줬습니다. 냉장고 한편에 남은 부추 한 줌을 얹고 후추를 갈아서 뿌렸어요. 간은 심심했지만 동생의 마음이 예뻐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동생이랑 많이 싸웠는데 어른이 되고 나니 이렇게 든든한 내편이 없네요. 누나인 제가 남동생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답니다.
맥주잔에 호가든을 절반쯤 따르고 그 위에 숟가락을 대고 천천히 기네스를 흘려주면 이렇게 층분리가 된 맥주 칵테일을 만들 수 있습니다. 블랙앤탠(Black&Tan)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더티호(Dirty Hoe)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흑맥주인 기네스의 쌉쌀한 맛을 호가든의 산뜻한 맛과 중화시켜 좀 더 편안하게 즐길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코젤 다크나 기네스 같은 흑맥주를 좋아해서 이런 맥주 칵테일도 매력 있었어요. 잔 바닥에 핸드폰 플래시를 받쳐두면 좀 더 그럴싸해 보입니다.
맥주는 보리, 홉, 물, 효모로 만들어지는데 맥주를 발효시키는 과정에서 효모가 위로 떠오르면 상면발효, 에일(Ale)이라고 부릅니다. 에일 맥주는 과일과 같은 향긋한 향과 진하고 깊은 맛이 특징입니다. 반대로 효모가 아래로 가라앉으면 하면발효, 라거(Lager)가 됩니다. 라거는 저온에서 장기간 저장시켜 만들기 때문에 깔끔하고 시원한 청량감을 느낄 수 있죠. 기네스와 호가든은 둘 다 에일 맥주입니다. 기네스는 아일랜드 맥주로 캔 안에 위젯이라는 플라스틱 공을 넣어 부드럽고 풍성한 거품을 만들어냈죠. 캔을 따는 순간 기압차에 의해 위젯 안에 들어 있던 맥주가 미세한 구멍으로 빠져나오면서 거품이 생긴답니다. 호가든은 벨기에 브랜드로 오렌지 껍질과 코리안더(고수)씨를 함께 발효해 독특한 풍미를 가진 밀맥주입니다. 서로 다른 두 가지 맥주를 섞어 칵테일을 만들면 색다른 매력을 즐길 수 있죠.
가지를 볶다가 늘 먹던 간장 양념이 지겨워서 냉장고에 있던 중국식 양념을 이것저것 넣어봤습니다. 적당한 크기로 썰어준 양파와 가지를 기름 두른 팬에 볶아주고, 두반장과 굴소스로 간하고 마지막에 참깨와 땅콩으로 만든 즈마장을 넣었어요. 즈마장은 참깨와 땅콩으로 만든 페이스트 같은 소스라 꾸덕하고 녹진한 고소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쪽파를 송송 썰어 뿌려줬는데 생각보다 아주 맛있는 가지 볶음이 되었답니다. 즈마장을 마라탕 소스로 자주 이용하는데 이런 반찬에 이용해도 좋을 것 같아요. 중화풍 가지 볶음으로 글을 써볼까 했지만 워낙 손가는 대로 만든 터라 레시피랄게 없답니다.
매일 같은 장소에서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지만 매일 근무 스케줄이 바뀌다 보니 하루하루 계획을 세워 살아가기도 힘드네요. 그렇다 보니 버려지는 시간들이 너무 아까워요. '작업실이 있으면 좋겠다.', '매일 같은 시간에 글을 쓰고 싶다.'는 바람이 점점 커집니다. 근사한 작업환경에서는 더 근사한 글을 써낼 수 있을 것만 같죠. 그러나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는 그 안에서 살길을 찾아야 한답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내 글이 부끄러울 때도 많지만, 어쨌든 글을 쓰는 이 순간 '제 자리를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어느 순간부터 글쓰기도 먹고사는 일의 일부가 된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