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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조각 Dec 07. 2022

할머니, 엄마, 딸 그리고 김장김치

김장날의 풍경

    김장 준비는 3주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마트에서 절인 배추를 예약하는 것부터 본격적인 김장이 시작되는 거죠. 김치를 담그는 과정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면 재료를 소금에 절이고 양념을 묻혀 보관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김장을 해보면 양념을 준비하는 것과 채소를 절이는 과정이 아주 까다롭죠. 적당한 염도의 소금물을 만들어서 배추를 절이고 다시 찬물에 헹궈 물기를 빼는 일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거든요. 예전에는 추운 겨울에 손이 얼어가면서 배추를 소금물에 담그고 씻곤 했어요. 물이 잘 빠지라고 층층이 겹쳐둔 배추를 위아래로 위치를 옮겨주고 김치가 싱거워 질까 물기를 손으로 꼭꼭 짜내기도 했죠. 그 단계에서 이미 허리가 아파지기 시작합니다. 요즘에는 공장에서 절인 배추를 살 수 있어서 한결 수월해졌죠. 소금물에 절인 배추를 한번 헹궈주고 채반에 널어 3시간 정도 물기를 빼준답니다.

    2주 전부터는 김치 양념 만들기에 돌입합니다. 우선 각종 재료부터 사야겠죠. 햇생강과 햇마늘을 한가득 사서 껍질을 벗기고 갈아 놓습니다. 올해 어머니는 생강을 갈아 설탕과 섞어 생강청을 한가득 만들어 두셨어요. 절반은 김치 양념에 쓰고 절반은 두고두고 요리할 때 사용하실 거랍니다. 멸치액젓과 새우젓도 가장 큰 통으로 하나씩 사두고 고춧가루도 넉넉하게 샀습니다. 아버지와 남동생이 몇 번이고 장을 보면서 힘 좀 썼더랬죠. 매번 짐꾼 노릇을 하는 게 귀찮다고 투덜거려도 어머니를 따라나서는 걸 보면, 두 사람도 내심 올해의 김장 김치를 기대하는 거겠죠?

    1주일 전부터는 육수를 우 린다고 주방에 수증기가 자욱해집니다. 커다란 솥에 대파, 사과, 배, 멸치, 북어, 말린 표고, 양파, 다시마, 늙은 호박을 넣어서 육수를 만든대요. 들어간 재료를 듣고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엄마...... 육수에 지구를 다 때려 넣은 거야?"

"응! 지구를 다 때려 넣은 육수야."

명랑한 엄마의 목소리가 사랑스럽게 느껴집니다.


    김장 전날에는 무를 채 썰고 청갓과 대파, 쪽파를 썰어 양념을 만듭니다. 고춧가루가 수분을 흡수해서 되직한 양념장이 될 수 있게 미리 버무려 두는 거죠. 남동생이 엄마를 도와 함께 무채를 썰었습니다. 커다란 대야에 고춧가루, 청갓, 쪽파, 대파, 액젓과 새우젓을 켜켜이 쌓아 놓습니다. 여기에 지구를 다 우린 듯한 육수를 붓고 하루가 지나면 채소에서 나오는 수분과 마른 고춧가루가 섞여 양념이 완성됩니다.

    김장날 아침에는 아버지와 제가 시장으로 나섰습니다. 신선한 생굴을 사러 갔는데 굴 1kg에 이만 삼천 원, 이만 오천 원, 이만 팔천 원…. 작년에 비해 가격이 부쩍 올라 고심하다가 1kg에 이만 팔천 원짜리로 구매했습니다. 묵혀두고 먹을 김치는 따로 담고 금방 먹을 한통에 생굴을 넣어서 먹어요. 김장하는 날 쭉쭉 손으로 찢은 김치와 생굴, 돼지고기 수육을 먹는 것이 나름의 가족 전통이죠. 여기에 뜨끈하게 끓인 어묵탕도 준비합니다. 길고 긴 김장 준비에 이만한 보상이 있어야 김장할 맛이 나지 않겠어요?


    어머니께서 절인 배추에 양념을 쓱쓱 바르는 동안 저는 이런저런 심부름을 합니다. 배추 포개 놓고 김치 담을 통 좀 가져와라. 틈틈이 돼지고기 앞다리살 수육을 만들어요. 계피와 월계수. 통후추로 향을 내고 설탕 2 숟갈, 간장 조금, 인스턴트커피 한 숟갈 정도 넣어 수육을 만듭니다. 수육을 끓일 때 설탕이나 콜라 같은 당분을 넣으면 고기가 훨씬 부드러워집니다. 간장이나 커피는 색도 먹음직스럽게 만들어 줘요. 수육이 끓는 동안 어묵탕도 끓입니다. 대파와 청양고추를 넣고 시원하고 칼칼한 어묵탕을 끓이는 동안 김장도 슬슬 마무리되는 것 같아요.

    재료 준비만 번거롭지 절인 배춧잎에 양념을 슥슥 발라 김치통에 넣는 건 금방 끝납니다. 어느새 김치통 5개에 차곡차곡 김치가 쌓입니다. 총각무와 무에도 김치 양념을 치대어 한통 만들어 둡니다. 이건 오래 묵혀두고 먹을 거라 김치 냉장고 제일 안쪽이 넣어주었죠. 저는 눈치껏 소금물과 식초에 깨끗하게 씻은 굴을 꺼내 옵니다. 김치 두 포기는 바로 순으로 쭉쭉 찢어서 생굴과 버무려 줍니다. 이제 수육을 썰고 어묵탕까지 올려서 한 상 차려야죠. 그전에 김장용 방수 포대도 씻고 양념이 묻은 대야도 깨끗하게 씻어 줍니다.  


    한 상 차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손으로 쭉쭉 찢은 김치에 생굴 한점, 수육 한점 돌돌 말아서 먹어요. 앞다리살이 부드럽게 잘 삶아져서 담백하고 맛있습니다. 그래도 아직 김장이 다 끝난 건 아니거든요. 콩잎김치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해 콩잎 김치도 담아요. 외할머니께서 하나뿐인 사위를 위해 소금물에 삭힌 콩잎과 김치 양념을 주셨거든요. 엄마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면서 숟가락으로 나뭇잎 같은 콩잎 사이에 켜켜이 김치 양념을 발라요. 가난했던 어린 시절 아버지의 밥상에 늘 올랐던 콩잎 김치. 가난에서 벗어난 지금도 가끔 찾으시는 반찬이에요. 그 입맛을 기억하고 번거로운 과정을 견뎌 콩잎김치를 준비해주는 사람은 결혼한 아내뿐입니다.


    “엄마, 요리라는 건 그 과정을 즐기지 못하면 정말 괴로운 일일 것 같아.”

    “그렇지! 요즘 요리 안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는 그 과정을 즐기기 때문에 매년 김장을 하고 반찬을 만들겠지?”

    “아마 그렇겠지?”


김장이라는 큰 행사를 위해 가족들 모두가 힘을 합치고 마지막에 큰 상을 차려 나눠 먹는 이 과정 모두가 고되지만 즐거운 일입니다. 그렇게 겨우내 우리 가족의 밥상이 풍성해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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