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을 위한 따뜻한 롤케베츠

가끔 나 자신을 위로하는 음식을 먹고 싶다.

by 구름조각

처음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을 때 겨우 15분 거리의 숙소를 2시간이나 헤매었어요. 처음엔 독일의 열차 U-bahn 티켓을 잘 못 사서 환불하느라 시간을 보냈고, 열차에 내려서는 가로등도 없이 어둑어둑한 거리에서 헤매느라 시간을 보냈고, 길을 건너려면 버튼을 눌러야 보행자 신호를 받는 독일식 신호등을 몰라서 멀뚱히 서 있느라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에어비앤비 숙소를 찾아갔더니 주소가 잘 못되었다고 해서 시간을 보냈어요. 다른 집에 에어비앤비 표시를 보고 무작정 문을 두드린 거죠.


친절한 집주인이 밤에 혼자 헤매는 저를 불쌍하게 생각하셨는지, 제가 찾던 숙소로 직접 데려다주셨답니다. 그러고 숙소 문을 두드리니 집주인이 제가 올 거란 걸 모르고 있더라고요. 이상하다 싶어 숙소 예약을 확인해 보니 이럴 수가... 제가 예약한 날짜는 27일인데 핸드폰에 뜨는 오늘 날짜는 26일이더라고요.


세상에 바보같이 한국에서 독일로 오면 날짜변경선을 지나는 걸 생각을 못했어요. 26일에 비행기를 타고 11시간이 지났으니 당연히 27일이겠거니 생각하고 예약을 한 거죠. 거기다 쓸데없이 함부르크로 이동할 기차표는 28일로 예약을 해 놨어요. 나 자신의 성실한 멍청함에 너무 놀라 버렸습니다. 아니 내가 이렇게 멍청할 수가?


그래도 다음날 생각지도 못한 하루가 생겼다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프랑크푸르트 시내를 구경했습니다. 높은 교회 첨탑도 가보고, 미술관도 가보고요. 미술관에서 일하던 큐레이터 한 명은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중동 출신 사람이었어요. 그 남자도 저처럼 이민자였던 걸까요? 저보고 귀엽다며 어디서 왔냐고 이것저것 묻더니 어디서 자냐고, 혼자 자냐고 묻더라고요. 그러면서 제 뺨을 만지면서 이메일을 알려달라고 하는데, 평소 같았으면 정색하고 지나쳤을 제가 이메일을 알려줬어요. 시차 적응을 못해서 몽롱한 데다 서툰 독일어로 대답하는데 급급해서 경계심이 사라진 모양이에요. 그렇게 또 나 자신의 친절한 멍청함에 너무 놀라버렸습니다. 저는 상냥한 바보였던 걸까요?


다음날 함부르크의 숙소로 도착한 후 일주일을 꼬박 앓았어요.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하게 지쳤거든요.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이 그리워졌어요. 누워있는 동안은 유튜브로 영상을 자주 봤는데 그중 하나가 <카모메 식당>이에요. 일본 여자가 낯선 핀란드에서 식당을 하며 정착해 가는 것처럼, 저도 낯선 독일 땅에서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었거든요.


여러 메뉴 중에서 시나몬 롤은 독일에 있을 때 몇 번 만들어 먹었어요. 이 롤케베츠도 그때 처음 만들어서 먹었는데 너무 맛있더라고요. 저는 롤케베츠를 <카모메 식당>에서 본 줄 알았는데,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찾아보니 <하와이안 레시피>라는 다른 영화에 나왔더군요. 두 영화의 분위기가 비슷해서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인 것 같아요. 그렇게 또 나 자신의 허술한 멍청함에 조금 놀라 버렸습니다. 이젠 예전처럼 많이 놀랍진 않아요. 내가 바보라는 걸 인정하면 세상에 배울 것들이 참 많아서 즐겁더라고요.


우선 양배추의 겉잎을 찢어지지 않게 떼어내는 게 제일 중요해요. 양배추 심지부터 도려내야 하는데 전 심지에 식칼을 푹 찔러 넣었다가 식칼을 뎅강 부러뜨렸습니다. 원래 바보들이 힘도 세고 건강한 법이에요.


갈아놓은 돼지고기 200g에 소고기를 100g 정도 섞었어요. 영화에선 베이컨 같은 걸 쓰던데 저는 소고기를 넣는 게 더 맛있더라고요. 양파 반개를 다져 넣고, 밥도 반공기 정도 넣어서 잘 뭉쳐지도록 주물러 줍니다. 우유에 적신 빵을 찢어서 넣어보기도 했는데 저는 밥이 더 좋아요. 한국인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소금과 후추, 마늘 한 스푼을 넣고 다진 생강도 조금, 말린 로즈메리도 조금 넣었습니다. 생강과 로즈메리의 향이 돼지고기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완성된 속재료를 데친 양배추 겉잎으로 싸서 말아주세요. 양배추 심지가 뻣뻣하면 살짝 도려내서 잘게 쫑쫑 다진 다음 속재료에 섞어줍니다. 여러분 식재료를 낭비하면 지옥가서 벌 받아요.

잘 말아놓은 양배추 롤에 밀가루를 살살 뿌려주고, 버터에 노릇노릇 구워줍니다. 향이 좋아요. 냄비에 옮겨 물을 붓고 치킨스톡 큐브 하나를 넣어줍니다. 월계수 잎을 한 장 넣으면 좋겠는데 냉장고를 아무리 뒤져봐도 보이지 않네요. 약한 불에 20분 정도 뭉근히 끓여주고 맛을 보면 맑은 국물도 꽤 매력이 있어요. 영화에서는 여기에 생크림과 사워크림을 넣던데 저는 생크림만 조금 넣었습니다. 큰 사워크림 한통을 언제 다 먹나 싶어서 살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밀가루가 버터에 익으면서 어느 정도 농도가 생기니 생크림 만으로도 고소하고 맛있어요. 접시에 덜어서 양배추 롤 위에 후춧가루, 파슬리 가루 조금에 페페론치노를 부셔서 올려줬습니다. 매운맛이 없으면 한국인의 식탁이 아니죠.


나 자신이 너무 멍청한 것 같아서 우울할 때 고소하고 부드러운 크림의 맛이 참 따뜻하게 느껴져요. 달큰한 양배추와 알찬 속재료도 든든하고요. 이 한 접시는 저의 영혼을 위로하는 따뜻한 치킨 수프가 아니고, 롤케베츠입니다.


사진은 여전히 어설프네요. 이럴거면 그림을 그리는 게 나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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