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온 아버지의 문장을, 딸이 엮은 기록.
시골의 문장들____
”가을을 품은 농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들녘에 풍성했던 오곡들이
농부의 집으로 이사를 온 듯
농부의 집이 가을로 가득 넘쳐난다.
대문에는 잡신을 쫓는 가시가 다닥다닥
붙은 엄나무가
파수꾼인 양 걸려 있고,
높다란 추녀기둥에는 종자로 쓰렸는지
말벌집 같은 옥수수타래가 몸매를 자랑하듯
홀라당 옷을 벗고는 쥐들의 애간장을
녹일 듯 매달려 있고,
그 옆으로는 장군을 호위하는 병사처럼
조 이삭과 수수 이삭이
참수를 당한 듯 목이 댕강 잘려
효수를 당한 듯 걸려 있다.
나락은 창고에 돌담 쌓듯 차곡차곡 쌓여 있고,
그 옆으로는 옥수수와 콩가마니가
왕을 호위하는 신하처럼
올망졸망 머리를 조아리고,
들깨와 참깨, 고추, 수수, 호박은
보물인 양 시렁에 덩그러니 올라앉아 으스대고,
대마도에서 시집온 고구마는
동남아에서 시집온 아낙네들처럼
갑옷을 입듯 솜이불을 두르고도
고추같이 추위에 넌덜머리가 나서
오들오들 떨며 쳇머리를 흔들어댄다.
창고 맞은편 헛간에는
윷가치처럼 쪼개진 수북한 장작들이
동장군을 막으려는 듯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뭉쳐 헛간을 지키고,
시렁에는
몸 바쳐 일하던 농기구들이
고장 난 벽시계처럼 걸려 꼼짝도 하지 않고
동면에 빠져 있다.
뒤뜰 양지쪽 담벼락 밑에는
가지만 남은 늙은 살구나무가
머지않아 펑펑 쏟아질 눈이불을 기다리며
명년 봄 꽃피고 새우는 봄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살구나무 밑 장독대에는
아들, 손자, 며느리 삼대가 오순도순 모여 사는 듯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올망졸망 모여 앉아
짧은 초겨울 햇살을 쪼이면서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
나의 이야기:
아버지의 글 속 농가 풍경은,
단순한 수확의 장면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작은 마을이었다.
옥수수, 조, 수수, 고구마, 장작, 장독대까지—
모든 것에 생명이 깃들어 있고,
작은 것 하나하나가
서로 기대어 가을을 품고 있었다.
아버지의 시선은 늘,
살아 있는 것들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