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 문장들

시골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온 아버지의 문장을, 딸이 엮은 기록.

by 밍키

시골의 문장들___

“벼와 산들바람의 오래된 이야기“


코스모스와 작별을 한 산들바람은

중병을 앓은 듯 시름시름 앓고 있는

벼들에게 달려간다.

"볏님들! 그동안 장대비 때문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벼들은 파리대가리 같은 이삭을

산들바람에 흔들거리면서

사흘에 피죽도 한 그릇 못 먹은 듯 힘없이 대답한다.

"산들바람도 소식을 들어 알고 계셨군요."

산들바람이 조심스레 묻는다.

"볏님들도 인간들 때문에 이런 몰골이 됐으니,

인간들이 밉지요?"

그 말을 들은 벼들은 버럭 화를 낸다.

"인간들 때문이라니요?

우리가 누구 덕분에 지금껏 살아왔는지 잘 알면서도

그런 무례한 말씀을 하시다니요!"

벼들의 따가운 반응에 산들바람이 말한다.

"그건 볏님들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 말씀이세요."

"모르긴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모른단 말인가요?"

곡식의 왕 격인 벼는 싸움이라도 할 듯

엉크러져 일어서며 산들바람을 다그친다.

산들바람은 부드럽게 진실을 꺼낸다.

"볏님들은 인간들이 이 세상에 오기 전부터

이 땅의 주인이셨답니다."

"뭣이라고!

우리가 인간들보다

이 땅에 먼저 뿌리를 박고 살았었다고?"

벼들은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산들바람은 이어서 설명한다.

"볏님들은 옛날에는 지금처럼 집단으로

무리 지어 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기름진 옥토에서 오순도순

정답게 모여 살았지요."

"하지만 인간들이 오고 나서 볏님들은 길들여졌고,

스스로 뿌리를 잊고 살아오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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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벼 이야기는,

단순한 농사 이야기 그 이상이었다.

자연의 본래 모습,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 존재,

그리고 그 안에서도 감사와 존엄을 잃지 않는

생명의 품격을 보여주셨다.

상처받아도 인간을 원망하지 않는 벼의 마음,

뿌리를 잊고 살아도 여전히 고개를 숙이는

벼의 겸손,

그 모든 것에서 아버지는

묵묵한 생명의 품위를 보고 계셨다.

그래서 이 글을 읽으면,

자연을 더 사랑하고,

살아 있다는 것 자체를 더 깊이 감사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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