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떻게 지내?”
“저야 뭐, 프리로 이일 저일 받으면서 지내죠~”
“아.. 그럼 나 좀 도와주라.”
출산을 앞두고 아내는 일을 쉬게 되었다. 일하던 NGO단체에 양해를 구하고, 출산을 준비하게 됐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외주와 아내의 월급으로 생활을 했는데, 오롯이 외주로만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아기가 태어나기 한 달 전, 다시 돈벌이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을 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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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서 지원해준 닭장 같은 사무실을 쓰던 스타트업 시절, 저렴하게 사용하던 사무실 임대기간이 끝나고, 합정동 사무실로 이사를 가게 됐다. 당시 우리 회사와 비롯해 두 회사가 함께 사무실 공간을 사용했다.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개발회사, 클라이언트로 만나서 관계가 좋아진 광고회사. 우리는 서로 식사도 같이 하고, 게임도 하면서 금세 친해졌고, 고민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서로 간에 마우스 개수도 알만큼 친밀해진 우리는 퇴사 후에도 종종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다.
광고 회사의 대표님은 부산 출신으로 정겨운 사투리를 썼다. 부산 형님이라고 지칭하겠다. 함께 사무실을 쓰던 시절을 지나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을 때, 부산 형님의 사업은 자리를 잘 잡아가고 있었다. 마리오타워 벤처 사무실 중 가장 크고 좋은 사무실을 쓰고, 직원들도 다수 있었다. 그랬던 형님이 도움을 청하셨다. 디자인 담당하는 직원이 기존의 디자인 파일을 다 포맷해버리고 퇴사를 했다는 것이다. 당장은 명절도 끼여있어서 광고주들에게 양해를 구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아 고민하던 중 내가 떠올라서 연락을 하셨다는 것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후에 듣기로 했고, 당장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있다고 하셨다. 업무 내용을 전해 들었다. 전부 내가 할 수 있는, 그전 광고회사에서 했던 일들이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작업 비용을 정했다. 그리고 매달 비용을 받고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자기 밥그릇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다. 아들이 태어나기 한 달 전, 정말 감사한 기회가 찾아왔고, 불안했던 마음에 평안의 단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아내와 가벼운 포옹을 했다. 서로 배가 많이 나와 꼭 껴안지는 못했지만... 작은 목소리로 ‘다행이다, 다행이다’를 속삭였다.
결혼 후 얼마 안 됐을 때, 외주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아내와 이야기했었다. 아내는 대학원 공부와 겹치니 공부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자고 했었는데, 대학원 공부가 끝나고,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안정적으로 매달 수입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두 군데가 된 것이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것, 겸손히 지금의 삶에 감사하자는 삶의 지혜를 배웠다. 많이 부족하고 연약하여 언제 넘어지고, 쓰러질지 모르지만, 프리랜서의 삶을 사는 나에겐 지금-여기에서 감사와 평안을 찾는 훈련이 필요함을 느꼈다.
아기가 태어나고, 아내와 산후 조리원에 들어가게 됐다. 함께 이모티콘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형이 축하 전화를 해줬다. 그리고 출산 선물로 조리원 비용의 절반을 계산해주셨다. 나는 몸 둘 바를 몰랐지만, 형은 옅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예전에 내가 퇴직금도 못 챙겨줬잖아. 항상 미안하고 마음에 걸렸거든. 마음 같아서는 조리원 비용을 다 내주고 싶은데, 지금은 좀 무리가 있어서... 아빠 된 거 정말 축하한다.”
은혜를 입었다. 8년 전에 시작된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누군가는 빨리 그 회사를 나오라고, 간이침대 있는 회사는 도망치는 게 상책이라고 말했다. 일정 부분 인정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때의 노력과 고생이 헛되지 않음을 아기가 태어나면서 알게 되었다. 종종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프리랜서가 오늘 일을 대충 하면, 내일 그 일을 다시 받을 수 없다고. 열악하게 시작했던 스타트업 시절의 열정은 일하는 태도를 만들어 줬고, 광고회사에서의 야근은 프리랜서로 일을 받을 수 있는 작업 수행능력이 되었다. 앞으로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어떤 인연을 만날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오늘도, 내일도 나는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