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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머리 Apr 20. 2021

햇살 좋은 봄날의 데이트-19,800원

잘 사는 사람의 사는 이야기 3


같은 계절이지만 겨울은 길게 느껴지고 봄은 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짧게 느껴진다. 춥고 메마른 나뭇가지로 겨울을 견딘 나무들은 봄을 기다렸다는 듯이 꽃망울을 터뜨리면서 봄이 왔다고 속삭인다. 바람이 불긴 하지만 매서운 바람이 아니라 산들산들 기분 좋은 봄바람에서 달콤함이 묻어난다.

어디든 나들이를 떠나고 싶은 날씨다.      


온라인 수업에 지친 큰 아이와 가까운 곳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차를 타고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오래된 가게인데 최근에 지인 소개로 알게 되었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다. 가게 내부 인테리어와 전체적인 분위기는 낡고 오래된 스타일이었고 빈티지라고 우길 수도 없는 다소 촌스런 곳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유행했던 프로방스풍의 꽃무늬 가득한 테이블, 삐걱대는 마루 바닥과 슬레이트 지붕이 보였다. 우리는 돈가스 세트와 함박 스테이크 세트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두리번거리며 가게 내부를 구경했다. 예전엔 오래된 물건이 낡고 고집스러워 보여서 좋게 보이지 않았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시간을 품은 채로 낡은 물건을 보면 그동안의 세월이 보이면서 애틋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감성의 변화도 나이 듦에서 오는 변화일까?     


어쨌든 새것만 좋아 보이던 젊은 시절과는 확연히 다른 감성으로 옛 물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생겼기 때문인지 나는 그곳의 촌스런 인테리어가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딸아이는 인테리어도 그렇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고개를 젓는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는데 플레이팅도 촌스럽다. 걸쭉한 소스와 돈가스 고기, 동그랗고 작게 모양낸 밥, 옆에 있는 양배추 샐러드에는 케첩과 마요네즈 섞은 옛날 소스가 뿌려져 있고 토마토와 피클까지 그야말로 옛날 스타일이었다. 내 입맛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딸아이에겐 맞지 않았나 보다. 딸아이는 뭐든 잘 먹어서 음식을 남기지 않는 편인데도 음식을 꽤 많이 남겼다.     

 

후식으로 나오는 음료로 나는 아메리카노를 딸아이는 유자차를 주문했다. 커피잔도 아주 오래된 것처럼 보였는데 영화 미녀와 야수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커피잔 세트를 떠올리게 했다. 우리는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새로 시작한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이야기, 이 가게의 오래된 인테리어 이야기, 음식 스타일과 맛에 대한 이야기, 좋아하는 디저트 이야기 등등.     


마주 앉아 얘기하는 아이를 보니 첫 아이를 낳고 작고 작은 아기를 보면서 어찌할 바 모르던 때가 생각났다. 첫 아이였기에 처음 겪어 보는 상황도 많아  힘들었지만 뭐든 다 해주고 싶고 잘 키우고 싶은 의욕이 컸다. 그 의욕이 때로 욕심이 되기도 했고 모르는 것도 많아서 실수한 것도 많았다. 아이에게 많은 것을 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이 모두 아이에게 도움이 된 것만은 아닌 듯해서 후회되는 것도, 미안한 것도 많다.      

그저 건강하게만 잘 자랐으면 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공부를 많이 시키진 않았지만 막상 학교  성적이 남들만큼 나오지 않을 땐 아이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성적이 나쁜 것보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과정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지만 그것도 결국 내 욕심에서 내 기준에서 하는 모진 말들이었을 뿐.


나는 꽤 괜찮고 잘 자란 좋은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첫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고, 부모가 되어서야 어른이 되려면, 사람이 되려면 아직 멀었구나 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지금 눈 앞에 있는 아이는 계속 성장하고, 나도 계속 성장하겠지. 그렇게 서로 성장하면서 작은 행복들을 놓치지 않고 잘 살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잘~산다.

온라인 수업하며 집에서 먹는 점심 대신 카페에서 먹는 돈가스와 함박스테이크.

햇살 좋은 봄날의 딸아이와의 데이트,  식사 비용 1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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