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약사 Jan 06. 2022

할머니의 홍익인간 정신

"저번에 그 유산균 하나 줘요."

"나도!"

"아, 그럼 나도 하나 먹어볼까?"

"이게 그렇게 좋아?"


조용하던 약국에 할머니들이 단체로 몰려와 저마다 한 마디씩 하신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랜만에 계모임을 했는데 한 할머니가 자기가 먹는 유산균이 좋다고 말한 것이 발단인 듯하다. 나이가 들면 다들 건강이 가장 큰 관심사라 누가 뭘 먹고 뭐가 좋은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 것 같다.


각자 자리에 앉아 지갑에 꼬깃꼬깃 접어서 넣어두었던 돈을 꺼내 손으로 쓸어내리며 얼마냐고 물으신다. 결국 네 명의 할머니 모두 그 유산균을 하나씩 구매하셨다. 나는 한마디도 거들지 않았는데, 두말없이 너도나도 사이좋게 하나씩 사서 가방에 챙기시는 모습이 귀여웠다. 힘들이지 않고 순식간에 판매할 수 있어서 좋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씁쓸했다.




사실 영양제나 건강기능식품을 사러 오시는 분들 중에는 내 나름대로 좋은 제품을 선택하여 진심을 다해 열심히 설명해 드려도, 시큰둥하게 반응하거나 망설이다가 결국 사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직접적인 이득 관계인 내가 하는 말보다는 아무 사심 없이 추천해주는 옆사람의 말이 더 설득력 있나 보다.(사실 나는 근무약사라서 직접적인 이득 관계도 아니지만...)


건강 관련 방송을 보고 거기 나오는 제품을 꼼꼼히 메모해서 갖고 오시는 분도 많다. 티브이를 잘 보지 않는 내 입장에서는 가끔 생소한 제품도 있어서 검색을 해볼 때도 있는데, 부분 인터넷이나 홈쇼핑으로 유통되는 제품인 경우가 많다.


하루에도 여러 명이 같은 제품을 찾으면 '방송에 나왔구나'라직감한다.(역시 방송의 힘이란 대단한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반대로 물어보는 여유도 생겼다.

"티브이에서 보셨나 봐요. 어느 프로그램에 나왔던가요?ㅎㅎ"

그러면 멋쩍은 듯 웃으며 프로그램 이름을 말한다. 그리고 티브이에서 본 건 어떻게 알았냐고 놀란다.


건강 관련 방송은 대부분 전문인(박사님)이 나와서 설명을 하기 때문에 일반인들, 특히 연세가 많분들은 거의 백 프로 그 내용을 신봉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유산균도 특정 균주를 집어서 꼭 먹어야 된다고 나오면 그것만 찾아서 약국 투어를 하시기도 한다.


일반인들에게 건강 관련 정보를 알려주는 것은 방송의 순기능이지만, 아쉬운 것은 제품 홍보나 판매를 위한 방송도 있어서 특정 제품을 먹어야 된다고 유도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방송을 보고 적어오신 분들은 약국에서 적절한 다른 제품을 권해도 사지 않으신다. (마치 코로나 백신 접종 이후 타이레놀이 품절이라 다른 회사의 아세트아미노펜을 권해도 사지 않는 것처럼...) 일반인들 약을 판매하여 직접적인 이득을 보는 약사의 말보다는 티브이에서 하는 말 더 신뢰하는 듯하다.


하지만 나 역시 소비자의 입장일 때는 판매자가 하는 백 마디 좋다는 말보다 실제로 옆사람이 써보고 좋다고 하는 한 마디 말을 더 신뢰하기 때문에 또 이해는 된다. 나도 이해당사자가 아닌 나의 주변인, 또는 인터넷 검색 결과를 더 신뢰하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이 물건을 구입하기 전에 리뷰를 찾아보고, 판매자는 긍정적인 리뷰가 많도록 관리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일 것이다. (요즘은 협찬받고 좋은 리뷰를 써주거나, 증정 이벤트 같은 걸로 좋은 리뷰가 많아지도록 만드는 문제점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래서 그 순간 조금 씁쓸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아무렴 어떤가' 

어쨌든 할머니들이 유산균을 복용하여 효과를 보고 좋다고 또 사러 오신다면 모두가 다 해피엔딩이다. 할머니들은 좋은 유산균을 먹어서 좋고, 약국은 힘들이지 않고 판매를 하니까 좋고. 이거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다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구매'를 불러오는 최초의 한 사람을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계모임에서 본인이 먹는 유산균이 좋다고 말해 다른 할머니들의 지갑을 열게 만든 '최초의 할머니' 같은 사람. 대부분 본인이 먹는 약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 좋은 건 함께 먹자는 '홍익인간 정신'으로 그 사실을 널리 알리시는 분들이다.


약은 '플라세보 효과'도 무시할 수 없어서 좋다고 믿고 먹으면 더 효과가 좋을 수 있다. 그래서 홍익인간 정신으로 유산균을 칭찬하며 홍보하신 그 할머니 덕분에, 아마 나머지 세 분도 효과가 좋다고 또 사러 오실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전 09화 우리 엄마는요, 알약도 못 먹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