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대중들 사이에 '스테로이드 포비아'가 번지고 있다. 스테로이드 포비아는 일본에서 시작된 현상으로 스테로이드에 대한 공포나 거부감을 뜻한다. 우리나라에도 아토피 피부염을 가진 아이들이 많아지면서 스테로이드 외용제 사용이 많아졌고 그 부작용에 대해 언급하는 방송 또한 많아졌다. 인터넷 검색창에도 스테로이드를 입력하면 효과보다는 부작용에 대한 내용이 훨씬 더 많이 나온다.
그렇다면 스테로이드란 무엇일까? 스테로이드는 크게 부신피질호르몬과 성호르몬으로 나뉘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은 부신피질호르몬제이다. 이는 강력한 항염증, 항알레르기 효과가 있어서 습진 등 피부 염증 증상뿐 아니라 호흡기 감염증, 만성 기관지염, 관절염, 아토피, 천식 등에 아주 광범위한 용도로 사용된다.
조금 생소한 단어라 약 봉투에 적혀있는 것을 보고 환자들이 문의를 하는 경우도 많다.
"피부가 가려워서 왔는데 호르몬제를 왜 먹어야 되는 거예요?"
"아.. 그건 생각하시는 그런 호르몬제가 아니고요. 우리가 보통 말하는 스테로이드제예요."
"스테로이드라고요? 이거 안 좋다던데.. 안 먹으면 안 돼요??"
이런 반응이 많아서 사실 복약 설명을 할 때 스테로이드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하기가 조심스럽다. 그래서 스테로이드라는 말 대신 약의 효과 위주로 설명을 하는 편이다.
피부과 밑에 있는 약국에 근무할 때는 매일같이 스테로이드 처방이 나왔다. 습진이나 아토피, 알레르기 등 피부 증상에 1차적으로 사용하는 약이 스테로이드이기 때문이다. 외용제와 경구약 모두 처방이 나오는데, 복약 설명을 할 때면 무조건적인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방송이나 인터넷에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다소 자극적으로 스테로이드의 심각한 부작용만 부각해서 알려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스테로이드를 절대 사용해서는 안 되는 '악마의 약'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결과 처방이 나와도 연고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먹는 약은 임의로 빼거나 쪼개서 먹는 등 양을 줄이기도 한다.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에 대해 인터넷에 찾아보면 무시무시한 내용들이 많이 나오지만, 경구약의 경우 실제 환자들이 자주 호소하는 부작용에는 불면증, 딸꾹질, 위장장애, 상열감, 일시적 혈당 상승 같은 것이 있었다. 물론 이런 부작용도 직접 경험하는 환자들 입장에서는 힘든 것이고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약을 끊으면 괜찮아지는 것들이고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상도 아니다. 따라서 무조건 스테로이드를 거부하거나 공포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대신 스테로이드제로 원하는 효과를 보았다면 빠른 시일에 중단할 것을 전문가들은 권장하고 있다. 하지만 호르몬계에 강력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스테로이드를 일정 기간 사용했다면 바로 중단해서는 안 된다. 반동 현상으로 증상이 급격히 악화될 수 있고 금단 증상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테로이드를 중단할 때는 반드시 의사의 지시에 따라 용량을 줄이거나 또는 격일로 복용하는 등 적절한 방법을 따라야 한다.
스테로이드 외용제의 경우 많은 의사들이 '불 끄는 소방관'에 비유하기도 한다. 염증이 끓어오를 때는 효과가 확실한 약을 써서 빨리 치료해야 한다. 작은 불이 났을 때 제대로 빨리 끄면 되는데, 그 시기를 놓치면 결국 큰 불로 번져서 끄는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마찬가지로 초기에 적절히 약을 쓰지 않으면 결국 더 오랫동안 더 강한 약을 사용해야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스테로이드 외용제를 무작정 기피하는 것은 오히려 병의 호전 기회를 놓쳐 병을 키우는 결과를 낳을 수 있으므로 꼭 필요할 때는 잘 쓰는 것이 현명하다.
한때 '안아키'가 유행처럼 번지던 때가 있었다.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라는 뜻의 카페로 절정기에는 회원 수가 6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카페의 운영자는 한의사였는데 자연 치유를 주장하며 아픈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 치료하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반드시 약을 쓰고 치료를 해야 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극단적 자연치유를 강요했고, 심지어 아이가 스스로 '아프니까 병원에 가자'라고 졸랐지만 눈물을 삼키며 그 말을 무시했다는 회고록도 있다.
예전에 티브이에서 이 내용을 다룬 방송을 본 적이 있는데, 의학적으로 전혀 검증되지 않은 숯가루를 아이들에게 먹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숯가루 같은 것을 '현대 의학품에 대한 대체제'라는 명목으로 비싼 값에 판매하여 이득을 챙기는 것을 보며, 아이들의 건강을 담보로 장사를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한 항생제나 스테로이드제는 위험한 것이고 민간요법인 숯가루는 안전하다는 발상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게다가 화상 온수 요법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이는 화상을 입었는데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하지 않고, 오히려 40도 정도의 온수에 화상 부위를 담그는 것이다. 40도 정도의 온수는 어른이라도 저온 화상을 입을 수 있는 온도인데 피부가 약한 아이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아이가 싫다고 우는데도 그 방법을 강요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며 잘못된 신념이 얼마나 위험한지 느꼈다.
결국 안아키는 과한 약 사용에 대한 부모들의 우려와 거부감을 이용한 일종의 마케팅이었다고 생각한다. 안아키를 맹신한 부모들 역시 아이를 힘들게 하려는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고 싶은 마음이 지나쳐 근거 없는 치료법을 믿고 따랐을 뿐이다. 잘못된 맹신의 결과 아이와 엄마 모두 고통받는 것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그 방송 이후 안아키가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안아키 부모들 중 후회하는 사례도 계속 나왔다. 약에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남용하는 것도 문제지만, 무조건 약을 안 쓰겠다고 배척하는 태도 역시 위험하다. 약에 대한 잘못된 신념은 오히려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
한자로 약사는 '스승 사'자를 쓴다. 약사란 단순히 약의 전문가로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라, 환자들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약사는 무조건 스테로이드를 거부하는 환자들에게 정확한 정보와 올바른 사용에 대해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스테로이드는 '양날의 검'과 같다. 칼을 잘 사용하면 사람을 살리거나 요리를 할 수 있지만 미숙한 사람이 칼을 쥐면 흉기가 되어 다칠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용법으로 적절히 사용한다면 스테로이드는 좋은 약 임에 틀림없다. 다만 효과가 좋은 만큼 남용할 가능성도 높고 그에 따른 부작용이 있는 것이다. 스테로이드 포비아는 결국 효과가 너무 좋아서 약을 남용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다. 뭐든 과하면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고, 세상에 부작용이 없는 약은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스테로이드는 '악마의 약'이 아니다. 꼭 필요할 때만 올바른 용법으로 잘 사용한다면 여러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좋은 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