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그 술이 문제다. 술도 기호식품이니 마시는 것 자체를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평생 먹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약을 복용하는 동안만 좀 참으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 내가 술을 별로 즐기지 않아서 더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사실 어떤 약이든 약을 복용할 때는 가급적 술은 안 마시는 게 좋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주의해야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무좀약, 항생제(특히 메트로니다졸), 타이레놀, 신경안정제, 수면제, 항히스타민제, 항우울제 같은 약물을 복용할 때이다. 알코올이 대사 되는 과정에서 약효에 영향을 미치거나 몸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약이 처방 나올 때는 마지막에 꼭 한마디 덧붙인다. 약 먹는 동안에는 술 드시지 말라고.
그러면 가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 술 마실 때는 약을 안 먹으면 되겠네요."
아니 아프면 술을 안 마시고 약을 복용해야지, 왜 굳이 술을 먹기 위해 약을 안 먹겠다는 건지...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차마 말로는 내뱉을 수 없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직 덜 아프신가 보네.. 더 아파봐야 정신을 차리지...'
약국에서 겪은 술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소개해본다.
1. 간에게 사과해야 되는 남자
"아~~ 어제 너무 마셨나 봐.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전화 통화를 하며 젊은 남자가 약국으로 들어왔다.
"타이레놀 하나 주세요"
"혹시 술 마시고 머리가 아파서 드시려고요?"
"네"
"숙취로 인한 두통에는 타이레놀 드시면 안 돼요. 간 손상이 생길 수도 있어요."
"정말요? 이때까지 계속 먹었는데?"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 타이레놀은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진통제이고 임산부도 경우에 따라 복용할 수 있지만, 아세트아미노펜 성분이 알코올과 만날 경우 간독성 유발 물질이 생성되어 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도 있다. 그 남자분이 계속 괜찮았던 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된다.
그동안 간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알코올 분해하기도 바쁜데 머리 아프다고 타이레놀까지 먹었으니.. 정말 간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될 일이었다. 그래서 그분께는 타이레놀 대신 일회분의 간 해독제와 그동안 고생한 간을 위한 간 영양제를 권해드렸다.
2. 불난 집에 부채질한 아주머니
피부 마사지를 받고 얼굴에 알레르기가 생겨서 피부과 약 처방을 받아 가신 아주머니. 그런데 다음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 손부채질을 하며 약국에 오셨다.
"이게 무슨 일이래~~ 내가 어제 가려워서 밤에 잠도 못 잤어"
"어제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심해지셨어요?"
"그러니까 말이야~ 이 약이 효과가 없는 거 아니야? 그래서 원장님한테 약을 좀 바꿔달라고 했어"
"그렇지는 않을 텐데.. 어제 뭐 특별히 하신 건 없으세요?"
"어제? 친구들하고 맥주 한 잔 하고 땀 뺀다고 사우나 다녀온 거밖에 없는데"
"아... 그러니까 그렇죠... 제가 어제 술 드시지 말라고 했잖아요ㅠㅠ"
"겨우 딱 한 잔인데 뭐~~ 하도 가자고 해서 갔지"
"술도 술인데, 사우나까지 가셨으니까 그렇죠. 원래 피부에 열이 오르면 알레르기나 가려움증이 더 심해져요...;;"
안다. 맥주 한 잔이라고 하지만 결코 한 잔으로 끝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알코올 때문에 피부 혈관이 확장되어 있는 상태에서 뜨거운 사우나까지 갔으니..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었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피부 알레르기가 있을 때 처방되는 항히스타민제 역시 술과 함께 복용하면 안 된다. 항히스타민제 자체로도 조금 졸릴 수 있는데, 알코올의 중추신경 억제 효과까지 더해지면 정신이 몽롱하고 어지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술을 마시면 약효도 떨어지고 부작용도 생기는 것이다.
3. 술이 세다고 자랑하는 아저씨
"무좀약은 빠지지 말고 잘 챙겨 드셔야 되고요. 약 복용하는 동안에는 술 드시면 안 돼요. 간에 무리가 올 수 있거든요."
"회식도 있고 약속도 있는데 어떻게 술을 안 마셔? 한두 잔은 괜찮죠?"
"안돼요. 치료하는 동안만 좀 참으세요."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는데도 굳이 다시 물어보는 심리는 뭘까? 한두 잔은 마셔도 괜찮다는 말을 듣기 위한 일말의 기대감일까?
안 된다고 잘라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저씨는 다음 달에 무좀약을 타러 와서 자랑하듯 이야기하셨다.
"에이~ 저번에 술 마시면 안 된다고 하더니 먹어도 아무렇지도 않던데?ㅎㅎ 내가 원래 술이 좀 세거든."
아... 아저씨 그건 자랑할 일이 아니거든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먹는 무좀약은 간에서 대사 되는데, 간혹 간독성을 유발하는 경우도 있어서 주기적으로 간 수치를 체크하며 복용한다. 그런데 술까지 마시면 당연히 간독성이 증가할 수 있다. 따라서 한 번은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누적되면 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무도 모른다. 술이 세다고 자랑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까지 읽고 아마 뜨끔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면 지금부터라도 술을 조금 멀리하는 게 어떨까?
사실 주의를 요하는 약물이라고 해도 술을 마신다고 죽는 건 아니다. 마시지 말라고 해도 꼭 마시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안다. 약사가 술 마시지 말라고 이야기하면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말인가 보다, 하고 잔소리 정도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안다.
만약 "이 약 먹을 때 술 마시면 죽습니다"라고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조금 경각심을 가지려나?ㅎㅎ
약을 복용하면서 술을 마시는 건 자유의사지만 건강에 어떤 문제가 생길지는 장담할 수 없다. 다행히 몸이 잘 견뎌주어 별일 없이 지나갈 수도 있지만, 예상치 못한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굳이 확률을 알 수 없는 위험한 도박에 본인의 건강을 베팅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