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본재 Sep 02. 2019

좋은 친구로만 생각했던
네가 날 좋아한다면?

나는 왜 피할 수밖에 없었을까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있다고들 한다. 일반적으로 사랑의 종류에 대해 떠올려보면 연인 간의 사랑, 모성애와 부성애, 부모님에 대한 사랑, 반려동물에 대한 사랑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는 것은 타인에 대한 연애 감정으로서의 사랑, 즉 이성애와 동성애에 관한 것이다. 이 둘은 사랑의 형태에서 논란이 될 뿐만 아니라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에 선택할 수 없는 형태로 다가온다는 것이 문제다. 더불어 내가 이성애자 혹은 동성애자일 때 내가 좋아하는 상대방 혹은 나를 좋아하는 상대방이 나와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그때는 사랑이 아닌 고통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벌써 10년이 넘은 옛 기억이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근방에서 유명한 여고였다. 그것도 공부 잘하는 애들이 많은, 대학 잘 보내기로 유명한 학교였다. 나는 운 좋게 이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입학하자마자 한 친구와 유독 친해지게 되었다. 그 친구는 같은 중학교에서 온 애가 하나도 없어 친구가 없었던 나에게 정말 친근하게 다가와주었고, 나는 그런 그 친구에게 정말 고마웠다. 그렇게 우리는 쉬는 시간마다 깔깔거리고, 급식을 함께 먹으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물론 여느 여자애들처럼 우리도 둘이서만 놀았던 것은 아니고 함께 어울려 다니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6명이든 10명이든 몰려다니는 무리가 있어도 그 안에서 유독 잘 통하고 친한 친구가 있기 마련이다. 그 친구와 나는 이런 관계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관계는 채 한 학기를 넘어가지 못하고 깨지고야 말았다.



사람들이 흔하게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 여고에 다니는 애들은 반에 남자애들이 없고 모두 동성이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서로 신체를 터치하거나 생리 현상과 관련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큰 소리로 외치고 다닌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물론 그런 애들도 있긴 하지만, 한 반에 35명 정도의 학생들이 있다고 하면 한, 두 명 혹은 많으면 3, 4명 정도의 소수의 애들만 그런 말이나 행동을 할 뿐이다. 나는 그 <소수>의 거리낌 없는 애들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친구들이 너무 과도하게 스킨십을 하면(예를 들어 같은 여자라고 하더라도 장난으로 가슴을 터치하는 것) 티 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친구가 나를 대하는 행동 때문에 당황스럽기 시작했다. 둘만 있을 때 내 엉덩이를 허락 없이, 단순히 장난 수준의 터치가 아니라 은근한 손길로 쓰다듬거나 어깨동무를 하는 척하면서 가슴으로 손이 내려와서 은밀하게 만지는 것이 아닌가? 신체적 스킨십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라고 할지라도, 장난 수준의 스킨십과 그 이상의 오묘한 스킨십은 충분히 구별할 수 있었다. 이후 그 친구에게 ‘나는 이런 스킨십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웃는 얼굴로 좋게 돌려 말했으나 그 친구의 행동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학교 생활이나 일반적인 친구 관계 외적으로도 나에 대해 너무 깊게 공유하고 싶어 했다. 이런 상황이 힘들고 부담스러웠던 나는, 그리고 함께 어울리는 무리의 친구들도 생각해야 했던 나는, 어린 마음에 무작정 그 친구를 슬쩍 피하는 방법을 선택해버렸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그냥 피하는 것 말고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한편으로는 딱히 ‘이렇게 반응했었어야 했다’라고 할 만한 좋은 방법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피하기만 했던 방식은 왠지 모르게 나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든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난 일주일 가까이 노골적으로 그 친구와 단 둘만 있는 자리를 피했고 일부러 친구들 무리에서만 머물고자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친구는 학교가 끝나고 할 말이 있다면서 나를 불러내었고, “너 요즘 왜 나 피해? 전화나 문자도 씹고?”라며 묻기에 이르렀다. 나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안 피했어…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야...”라는 바보 같은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이후 우리는 그렇게 멀어져서 고등학교 3년 내내 복도에서 마주쳐도 서로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땅만 보고 걷는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어렸던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 되돌아보아도 그 친구가 나를 연애 감정으로 좋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당시 교내에는 소문이 무성한, 매우 유명한 레즈비언 커플도 있었기 때문에 그때의 우리에게는 동성애가 그렇게 먼 이야기가 아니었다. 난 그때나 지금이나 동성연애자인 친구를 좋은 친구로서만 곁에 두는 것에 있어서는 거부감이 없다.(단, 내가 관심 없는 이성애자인 친구가 나를 좋아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동성연애자인 친구가 나를 연애 대상으로서 좋아한다고 하면 그때도 마찬가지로 친구 관계를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 친구는 날 연애 감정으로 좋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친구에게 나는 아무런 이유 없이 본인을 피한 미친년으로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친구가 날 연애 감정으로 좋아한 것이 맞다고 하더라도 난 다른 방식으로 성숙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취했던 일방적인 방식이 지금의 날 소름 끼치게 부끄럽게 만든다. 그 친구는 마냥 어렸던 나의 말과 행동으로 트라우마를 가졌을 수도 있기에… 그럼에도 이만큼 나이를 먹은 내가 그때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더 성숙한 대처를 할 수 있을까? 이것만큼은 솔직히 아직도 확신하지 못하겠다. 그래서 난 지금도 부끄럽고 또 부끄러우며, 창피하고 또 창피하다.







에디터 푸들

앞으로 여러분들께 저의 지나온 연애사를 비롯해 제 주변 지인들로부터 들었던 현실감 있으면서도 공감 가는 사랑, 연애, 결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또 여러분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하고 연애하며 그 과정에서 결혼을 고민하고 가끔은 비혼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수많은 보통 사람 중 한 명의 이야기, 기대해주세요.



<결혼에 대한 좋고 나쁨의 단상> 목차 보러 가기

스튜디오 크로아상 콘텐츠 보러 가기


▼ 웨딩해 콘텐츠 더보기 ▼

비혼 주의자였던 내가 결혼을 하게 된 이유

나보다 더 잘 나가는 너와의 연애

나의 비혼식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